6일 오후 서울 강서구 화곡역 인근 부동산중개업소. 문이 굳게 닫힌 채 조명이 꺼져 있었다. 매물 정보를 걸어 놓던 게시판은 텅 비었다. 맞은편 중개업소도, 한 칸 건너 중개업소도 불이 꺼졌다. 30m쯤 걷자 문을 연 중개업소가 나왔다. 대표 A씨는 "손님이 없는 데다 구청이 단속에 나선다니 뭐라도 책잡힐까 봐 아예 영업을 안 하는 곳도 있다"고 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하소연이 물든 지역엔 중개업자들의 한숨도 남았다. 한국일보는 6~9일 서울 강서구와 은평구, 인천 미추홀구 등 전세사기가 심했던 빌라 밀집지역을 찾았다. 사회초년생, 신혼부부의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하다 전세사기의 표적이 된 신축 빌라는 기피 대상 1호가 됐다.
9일 화곡동에서 만난 임모(43)씨는 20년 된 투룸 빌라를 매물로 내놓은 지 두 달이 되도록 연락 한 통 받지 못했다. 2억3,000만 원에서 2,000만 원을 더 내렸지만 효과는 없었다. "부동산에서 빌라 전세는 요즘 절대 안 나간다고 말리길래 매매로 내놨는데 사겠다는 사람이 없네요."
세입자들은 빌라 탈출을 꿈꾼다. 이모(29)씨는 6월 전세 만기를 앞두고 대출을 더 받더라도 아파트를 알아보고 있다. "설마 전세금을 못 받는 건 아닌가 겁이 나더라고요. 혹시나 해서 집주인한테 연락하니 '(빌라왕과 달리) 난 한 채만 갖고 있다'며 꼭 돌려주겠다고 해서 그 말만 믿고 있어요."
중개업소들은 기대를 접었다. 한 중개업소에 들어서자 주인 얼굴에 화색이 돌았지만 이내 기자라는 소리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금리도 오른 데다 전세사기 걱정에 빌라 전세를 찾는 손님이 1년 새 절반으로 줄었다"고 했다. 또 다른 중개업소 대표 B씨는 "수요가 4분의 1토막이 났다"며 "신혼부부, 청년, 노년층 등 서민을 위한 주택이 연립·다세대주택인 빌라인데 참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혀를 찼다.
현지 분위기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10일 기준 서울정보광장에 집계된 지난달 화곡동의 연립·다세대 주택 전세 거래량은 331건에 그쳤다. 지난해 1월(761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월 700건대를 유지하던 거래량은 전세사기 이슈가 부상한 지난해 하반기부터 급감했다. 그나마 전세를 찾는 세입자들은 한층 깐깐해졌다. "보증보험 가입 여부나 집주인 신상 등을 거듭 따진다"는 것이다.
대신 월세로 몰렸다. 보증금 떼일 걱정 적고, 전세대출금리가 월세 수준으로 올랐기 때문이다. B씨는 "작년에는 투룸 월세가 70만 원 정도 했다면 지금은 100만 원, 110만 원에도 나간다"고 했다. 강서구가 포함된 서울 서남권의 연립·다세대 월세가격지수(한국부동산원)는 지난해 1월 100.2에서 계속 올라 12월 100.7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전세가격지수가 101.3에서 98.6로 급감한 것과 대비된다.
빌라업자들은 죽을 맛이다. 배달 등 부업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서울과 경기에서 10년간 신축 빌라를 분양해 온 C씨는 "지난해 하반기 이후 계약은커녕 문의 전화도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전셋값을 매맷값보다 높게 불러 전세사기 핵심 고리로 이용되는 동시진행 탓에 이미 매맷값이 터무니없이 올라 빌라 거래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정부가 동시진행 등 전세사기 수사에 나섰지만 현장에선 역부족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안 잡힌 사람이 엄청 많습니다. 이미 손 털고 나갔는데 어떻게 찾겠어요. 전세 영업을 하지 않는 분양업자나 부동산중개업자마저 전세사기 때문에 모두 도매금으로 욕을 먹으니 너무 억울합니다."
7일 은평구 증산동 곳곳에선 신축 빌라 분양이 한창이었다. 증산역 출구를 나서자마자 신축 빌라가 나타났다. 분양 관계자는 "1년이 되도록 계약률이 거의 제로(0)"라며 한숨을 쉬었다. 인근에서 5년째 부동산중개업소를 운영하는 D씨는 "3년 전만 해도 '단돈 1억5,000만 원에 30평 입주' 이런 현수막들이 동네에 걸려 있어서 내가 말려도 손님들이 다 그쪽으로 갔는데 지금은 어림없다"고 귀띔했다.
이 지역 중개업소들도 신축 빌라 전세를 권하지 않았다. 대략 이런 설명들이 돌아왔다. "신축 빌라 값이 높아요." "말도 많은데 솔직히 손님한테 권할 수가 없어요." "3억~5억 원대 빌라에 전세로 들어갈 바에 인근에 비슷한 수준까지 내려온 아파트 전세를 고려해 보세요."
전세사기 피해가 몰린 인천 미추홀구에서도 빌라는 애물단지였다. 상대적으로 비싼 아파트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만 빌라 전세를 물어보는 정도다. 제물포역 인근 중개업소 관계자는 "손님들이 빌라를 찾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신축은 물론이고 빌라 전세 수요 자체가 씨가 말랐어요. 작년 초에 완공해서 6개월이면 분양이 끝날 줄 알았던 빌라의 계약률이 현재 30% 수준에 불과합니다."
현장 부동산중개업자들은 정부의 잇단 전세사기 대책의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무자본 갭투기를 막기 위해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전세금반환보증 가입 대상을 전세가율(매맷값 대비 전셋값 비율) 100%에서 90%로 낮춘 게 대표적으로 꼽혔다.
미추홀구의 한 부동산중개업자는 "시장에서 통용되던 전세가율이 이미 90%대였는데 10% 낮춘다고 효과가 있겠냐"며 "여전히 높다"고 말했다. 미추홀구 연립·다세대 주택의 최근 3개월간 전세가율은 92.8%다.
화곡동 부동산중개업자 A씨도 "빌라가 경매에 들어가면 감정가의 70~80%까지도 떨어지는데 전셋값이 매맷값의 90%까지 되는 매물을 받아주는 건 적절치 않다"고 꼬집었다. 강서구의 경매낙찰가율은 지난해 12월 기준 최근 3개월간 71.7%를 기록했다.
현장에서 만난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빌라 전세는 당분간 살아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