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과 백인은 처음부터 다른 뇌를 갖고 태어날까. 미국 하버드대 연구진의 대답은 '아니오'다. 다만 빈곤과 구조적 인종 차별은 뇌에 실제로 악영향을 미친다. 미 흑인 어린이는 백인 어린이보다 더 많은 '역경'에 처하고, 이는 곧 뇌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너새니얼 하넷 하버드 의대 정신의학과 조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은 이 같은 내용의 논문을 '미국 정신건강의학저널' 최신호에 발표했다고 CNN방송이 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연구진은 2019년 미 국립보건원(NIH)에서 수집한 9, 10세 백인 어린이 7,350명과 흑인 어린이 1,786명의 뇌를 자기공명영상(MRI)으로 촬영한 사진을 분석했다. 그 결과 흑인 어린이와 백인 어린이의 뇌는 조금 달랐다. 흑인 어린이 뇌의 신경세포가 모여 회백색을 띠는 회백질 부피가 더 작았다. 특히 정서 정보 처리 능력과 관련된 전전두엽 피질(PFC), 감정적 반응에 관여하는 편도체, 기억의 중추인 해마의 용량에서 차이가 났다.
이는 어린 시절 경험의 인종 간 차이에서 비롯됐다는 게 연구진의 결론이다. 흑인 어린이는 이른바 '역경 지표'인 △소득 △교육 △고용 △지역사회 취약성 △물질적 어려움 △트라우마 이력·가족 갈등에서 백인 어린이보다 더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흑인 가정은 트라우마와 가정 폭력, 이웃의 폭력 등을 겪을 가능성도 더 높았다.
구체적으로는 이번 연구 대상 어린이의 백인 부모는 경제 활동을 할 가능성이 흑인 부모보다 3배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가계 수입은 물론, 교육 수준도 더 높았다. 백인 부모의 88.1%가 연간 3만5,000달러(약 4,378만 원) 이상을 벌었다. 그만큼 버는 흑인 부모는 46.7%에 그쳤다. 또, 백인 부모의 75.2%가 대학 학위를 가지고 있는 반면, 흑인 부모는 40.6%에 불과했다. 보고서는 "이러한 인종적 차이는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다"라며 "사회적 규범과 체계적 인종 차별을 통해 강화돼 온 뿌리 깊은 구조적 불평등에 기인했다"고 강조했다.
그 결과 흑인 어린이는 빈곤과 인종 차별이라는 '부정적 경험에 장기간 노출된' 상태에서 성장하게 됐다. 이로 인한 과도한 '독성 스트레스'는 곧 생각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뇌 회백질 용량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
문제는 일부 뇌 기능 발달 지연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구진은 흑인 어린이가 성인이 돼서도 정신건강 문제를 가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나 우울증, 약물·알코올 남용에 시달리거나 극단적 선택을 시도할 가능성도 커진다. 보고서는 "어린 시절 역경에 대한 인종 간 불균형이 야기한 신경 생물학적 결과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면서 "대규모의 구조적·체계적인 정책 변화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하넷 조교수는 이번 연구에 대해 "구조적 불평등과 인종 차별의 영향이 얼마나 일찍 뇌 발달에 나타나는지 분석한 것"이라며 "흑인과 백인의 뇌에 진짜 차이를 일으키는 것은 이들이 겪는 삶의 불균형"이라고 CNN에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