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가 국민의 알 권리 확보 차원에서 판결문 공개를 약속하고 나섰지만, 공개 정보의 광범위한 제한 등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개인정보 유출 방지 목적의 비실명화 작업으로 '암호문' 같은 판결문이 공개되는 등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시스템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30일 법원행정처 사법연감과 유상범 국민의힘 의원실 등에 따르면, 최근 4년간 연평균 43만 건가량의 형사와 민사, 행정 사건 확정 판결문이 공개되고 있다. 같은 기간 연평균 130만여 건의 판결이 나오는 걸 감안한다면, 전체 재판의 3분의 1 정도의 판결문이 공개되는 셈이다.
현재 변호사와 일반인의 경우, 대법원 인터넷 판결문 열람 시스템을 통해 건당 1,000원씩 결제하면 확정 사건 판결문을 받아볼 수 있다. 올해 1월부터는 확정되지 않은 민사와 행정, 특허 사건까지 검색·열람이 가능하다.
법조계에서는 판결문 공개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적이라는 불만이 나온다. 항소심이나 상고심이 진행 중인 형사 판결의 경우 매년 11만 건가량이 여전히 공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확정 형사 판결문을 열람하려면 까다로운 예약제를 거쳐 경기 일산에 위치한 법원도서관까지 직접 방문해야 하는데, 이조차 2013년 이전에 나온 확정 판결문은 제외된다. 판사들은 내부망을 통해 미확정 판결문도 바로 볼 수 있는 반면, 인터넷에 등록되는 판결문은 비실명화 작업을 거쳐 3~4주 뒤에나 공개된다.
정경일 변호사는 "일반인들은 대개 교통사고나 보험 처리 등과 같이 간단한 소송에 휘말리는데, 그런 소송일수록 판례 하나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성패를 가른다"며 "최신 하급심 판결을 알아야 혼자서도 소송을 헤쳐나갈 수 있는데 막상 일반인들에게는 공개 범위가 좁다"고 지적했다.
기껏 찾아내 결제한 판결문이 정작 자신의 사건과는 관련 없는 내용과 법리를 담고 있는 경우도 많다. 인터넷 판결문 열람 시스템이 핵심 검색어 기준으로 운영되기 때문인데, 해당 검색어가 포함된 판결문의 800~900자가량만이 미리보기로 제공된다. 자세한 사건 내용은 결제를 해야만 알 수 있고, 이름 등 개인정보를 가린 탓에 등장인물을 일일이 판독하며 읽어야 하는 고충도 만만치 않다.
서혜진 변호사는 "일반 국민 입장에선 핵심 검색어를 추리는 일도, 짧은 미리보기 분량으로 사건 내용을 짐작하는 일도 쉽지 않다"며 "판결문 공개 시스템이 법조인이나 언론인만 염두에 두고 구축된 게 아닌가 싶다"고 지적했다. 지방법원의 한 판사는 "판결문은 공공재이고, 언론과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분석 등으로 견제를 받아야 법원도 긴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 연방법원은 확정 여부에 상관없이 선고 후 24시간 이내 판결문을 공개하고 있으며, 독일도 선고 후 1~3개월 이내 판결문을 선별 공개하고 있다.
법원 역시 이 같은 지적과 고충에 충분히 공감한다는 입장이다. 법원행정처는 "미리보기 글자 수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면 시스템 과부하로 인한 장애가 발생해 큰 불편을 줄 우려가 있다"며 "글자 수 제한 등을 조금씩 완화하면서 과부하를 모니터링하는 방법 등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개인정보 유출 문제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게 법원행정처 생각이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특히 형사 판결의 경우 사건관계인의 민감한 개인정보가 포함되어 사생활 침해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며 "민사·행정 판결문 공개 시행 경과를 보고 형사 미확정 판결문 공개 여부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