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자리한 경남 양산 평산마을에 동네책방을 연다는 소식에 정치권과 더불어 출판계도 들썩이고 있다. ‘대통령’과 ‘독서’는 늘 큰 관심을 이끄는 키워드다. 대통령의 국정 운영 철학 및 방향이나 대국민 메시지를 가늠하는 좋은 소재가 되는 덕이다. 이 때문에 별다른 정치적 의도가 없더라도 대통령의 독서는 곧잘 고도의 정치 행위로 해석된다. 각양각색의 배경을 지닌 전·현직 대통령을 지금에 이르게 한 ‘인생 책’이나 그를 완성시킨 독서 습관에 대한 지적 호기심도 이런 화제성을 키우는 데 한몫을 한다. 책과 독서로 기억된 역대 대통령들의 모습을 살펴봤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소문난 다독(多讀)왕, 독서왕, 독서광으로 통했다. 청소년 시절부터 워낙 책을 좋아했으며, 1960년대 국회의원 재임 시절에는 틈만 나면 국회 도서관을 찾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는 그가 정부 고위관료, 박사, 교수 등 엘리트 출신으로 가득한 재정경제위원회에서 부대끼던 시절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대학에 못 갔더라도 열심히 공부하면 실력을 더 갖출 수 있다는 생각이 채찍이 됐다”고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
그는 1980년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옥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매일 10시간씩 책을 읽었다. 망명시절, 자택연금 중에도 비슷했다. 김 전 대통령은 박경리의 ‘토지’,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등을 통해 우리 민족의 운명 등에 대해 고민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의 재임 중에는 청와대가 대통령의 독서 목록을 처음 공개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개된 대통령의 책에는 ‘지식자본주의혁명’, ‘우리 역사를 움직인 33가지 철학’, ‘맹자’, ‘미래와의 대화’, ‘비전 2010 한국경제’ 등이 포함됐다. 그가 평생 두고 읽어야 할 것이라 꼽은 책으로는 존 갤브레이스의 ‘불확실성의 시대’, 피터 드러커의 ‘단절의 시대’, 박경리의 ‘토지’ 등이 있다.
재임 기간 내내 김 전 대통령이 정보기술(IT) 산업 육성에 크게 집중한 배경에는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탐독하며 받았던 감명이 자리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한 장의 사진으로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 당시 선거캠프였던 안국포럼 사무실에서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을 꺼내 읽는 모습이 언론에 공개된 뒤 곧바로 이 책에 이목이 쏠렸다. 후보 시절에는 자택 사랑방이나 안국포럼 사무실에서, 집권 중에는 집무실과 관저 서재에서 주로 빠르게 속독을 하는 실용 독서를 즐겼다고 한다. 빠르게 다양하게 읽으며 좋은 구절이나 메시지를 메모로 발췌했다가 나중에 활용하는 식이다.
서울시장 시절부터 대통령 재임기까지 자주 읽었거나 추천 도서로 꼽았던 책은 ‘쉽게 읽는 백범일지’나 마하트마 간디의 자서전 ‘위대한 영혼의 스승이 보낸 63통의 편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스펜서 존슨의 ‘선물’, 잭 웰치의 ‘끝없는 용기와 도전’ 등이 있다. 2009년 휴가를 떠나면서는 청와대 참모들에게 리처드 탈러의 ‘넛지’를 추천해 눈길을 끌었다. 편견 속에서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설득하는 방법에 대한 책이다. 실용을 강조하는 맥락에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시생 시절 직접 ‘개량독서대’를 특허출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개를 숙이고 오래 책을 볼 때 목이 저린 데다가 눈이 나빠져 집중하기가 어려워지자, 판자를 책 뒤에 대어 독서대를 만든 게 계기였다. “나도 만들어 달라”는 주위의 요청에 망치로 직접 독서대를 만들다가 1974년 특허 출원까지 받았다. 청와대는 2004년 ‘발명의 날’에 이 사연을 공개하기도 했다.
여당에서조차 줄곧 공세를 받는 등 지지세가 든든하지 못했던 노 전 대통령에게는 재임 기간 중 유독 책이 더 긴요한 메시지 전달 수단이 되곤 했다. 추천 도서의 저자가 요직에 중용되거나, 책의 핵심 메시지가 굵직한 행보에 반영되는 패턴이 도드라지면서 늘 대통령의 손에 쥔 책에 대한 관심이 컸다. ‘독서 정치’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를테면 당시 한미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전략에는 대통령이 읽은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가 영향을 줬다는 해석이 나왔고, 노 전 대통령은 이 책의 저자인 배기찬 당시 세종리더십개발원 소장을 동북아시대위원회 비서관에 기용하기도 했다. ‘21세기 한국정치경제모델’을 쓴 윤영관 전 외교부 장관, ‘변화를 두려워하면 1등은 없다’를 쓴 오영교 전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장관 등도 이런 패턴으로 중용된 사례로 꼽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오히려 휴가 도서 목록을 전혀 공개하지 않아 눈길을 끌었다. 이를 두고 그의 의원 시절 대변인을 맡았던 전여옥 전 의원은 “그의 서재에는 제대로 된 책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박근혜의 말’을 펴낸 우리말 연구자 최종희 작가는 “약 40년간 박 대통령의 일기에서 무언가를 읽었다는 언급은 어머니가 썼다는 수필집을 포함해 단 4차례지만 드라마, 어린이 프로그램, 교육방송, 동물 다큐멘터리 같은 TV프로그램을 본 뒤 남긴 글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고 적었다.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 조리장을 지낸 한상훈씨는 국정논단 사태 당시 채널A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은 평소에도 TV를 보면서 혼자 식사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정농단 재판으로 서울구치소에 구속수감 중이었을 때는 방학기 작가의 ‘바람의 파이터’, 허영만 작가의 ‘꼴’, 이두호 작가의 ‘객주’ 등 만화책이 박 전 대통령의 독서 목록에 올랐다. 유영하 변호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박 전 대통령이 ‘지리산’ ‘토지’ ‘객주’ 같은 소설을 읽고, 문화 관련 책이나 영문잡지도 본다”고 말했다.
비교적 독서를 즐긴 편은 아니나 지지자들의 관심 탓인지 박 전 대통령도 출판계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의 에세이 '그리움은 아무에게나 생기지 않습니다'는 지난해 교보문고 종합베스트셀러 4위, 정치사회분야 1위를 기록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문프셀러(문재인 프레지던트의 베스트셀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출판계에 뚜렷한 영향을 끼친 대통령이었다. 휴가 때 독서 리스트에 오른 책은 물론, 참모들에게 추천한 책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노출한 도서는 매번 큰 화제를 모았다.
2017년 여름에는 '명견만리'를 직접 추천하며 “개인도 국가도 만리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10년, 20년, 30년은 내다보면서 세상의 변화를 대비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고, 2018년에는 김성동의 소설 '국수', 진천규 전 한겨레 기자의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등을 추천 리스트에 올렸다. 임홍택의 '90년생이 온다' 역시 문 전 대통령이 청와대 전 직원들에게 추천 도서로 선물하며 존재감을 더 키웠다.
문 전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에서 “어떨 때는 (스스로가) 활자중독처럼 느껴진다"고 자평했으며, 2018년 서울국제도서전 개최식에서는 "(아버지가) 한 번 장사를 나가시면 한 달 정도 만에 돌아오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꼭 제가 읽을 만한 아동문학, 위인전을 사 오셨는데 독서를 통해 세상을 알게 됐고 인생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하며 책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퇴임 이후 추천한 책으로는 '나는 독일입니다', '짱깨주의의 탄생,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지정학의 힘', '쇳밥일지', '우주시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등이 있다. 퇴임 후에도 그의 독서 목록이 관심을 끌자 문 전 대통령은 이에 대한 부담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자신의 SNS에 “저의 책 추천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출판계에 도움이 된다니 매우 기쁘다"면서도 “제 추천은 독자가 좋은 책을 만나는 하나의 계기일 뿐으로 저는 그 일에 조그만한 징검다리 하나를 놓았을 뿐”이라고 적었다.
대통령의 책이 주목받는 게 국내만의 현상은 아니다. 미국 백악관은 전통적으로 해마다 대통령의 휴가 도서 목록을 발표한다. 이언 플레밍의 ‘007시리즈’는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애독서 10권으로 소개되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퇴임을 앞두고 한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8년간의 재임 기간 동안 주로 독서를 통해 위안과 힘을 얻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연대감을 느끼고 싶을 때 에이브러햄 링컨이나 마틴 루서 킹, 마하트마 간디, 넬슨 만델라 등의 책을 읽으며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집권 후 독서 리스트를 공개하지는 않았다. 인위적인 독서 리스트 공개가 쇼처럼 비칠 수 있다는 주위의 만류와 윤 대통령의 스타일이 영향을 줬다는 해석이다.
대선 후보 시절 추천한 책에는 ‘자유’에 방점이 찍혀 있다. 대선 기간 대한출판문화협회가 각 후보들에게 '인생의 책 또는 젊은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세 권을 묻자, 당시 후보였던 윤 대통령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밀턴 프리드먼이 쓴 '선택할 자유'를 꼽았다.
답변서에서는 “이 책은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서이기도 하지만 규제를 가할 때 발생하는 문제점을 고발하는 책으로 규제로 인해 발생하는 시장의 왜곡을 잘 분석했다”며 '자유보다 평등을 앞세우는 사회는 평등과 자유, 어느 쪽도 얻지 못한다'는 책 내용을 인용하기도 했다.
또 윤 대통령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도 추천하며 “내가 법대 진학을 결심하게 만든 계기가 된 책으로 학창시절 아버지 영향을 받아 경제학과 진학을 생각했다가 ‘자유론’을 읽고 아예 진로를 법학과로 바꿨다”고 밝혔다.
당시 답변서에서 최근에 읽은 책으로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지목했다. 윤 대통령은 “(저자들이) 국가의 성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은 지리적, 역사적, 인종적 조건이 아니라 정치와 경제 제도에 있다고 본다”며 “분배가 공정하지 않은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내용이 기억이 남는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