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관리 구출 전문... 올해 매출 1,000억 갑니다"

입력
2023.01.21 10:00
영천 ㈜세기리텍 이태준 대표
'2022년 노사문화유공 정부포상' 대통령 표창 수상 
부도 직전 몰린 회사 맡아 흑자 전환, 법정관리 탈출 
KB국민은행 시절 대출 업무 보며 쌓은 노하우 활용 
구내식당 식대 20% 인상, 음식 개선부터 시작 
"그동안 쌓은 노하우를 잘 정리해서 후배들에게 전하고파"



"이거 진짜 A레저의 재무제표 맞습니까."

부장판사가 문서를 들고온 회사 대표에게 물었다. 대표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혼잣말처럼 "사람 하나 바뀐다고 회사가 이렇게 확 달라지나"라고 감탄했다. 2014년 울산지방법원 파산부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다. 당시 회사는 1년 전부터 법정관리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대표이사를 맡고 있던 이태준(65)씨는 KB국민은행에서 본부장까지 역임하고 퇴직한 후 A레저의 회생을 맡고 있었다. 정확한 호칭이 '법정관리 대표이사'였고, 회사를 맡은 지 1년 남짓 지난 즈음이었다. A레저가 파산할 때 연 매출은 40여 억원, 이 대표이사가 1년 동안 경영을 개선시키자 매출이 10억 이상 성장했다. 얼마 후 재판부에 새로운 요청 하나를 들고 왔다.

"직원들 월급을 좀 올려야겠습니다."

황당한 요구였다. 처음에는 단번에 "안 된다"고 했던 부장판사도 결국 승인을 해줬다. "되로 주고 말로 성과를 내겠다"면서 네 차례에 걸쳐 찾아와 조목조목 설명을 하자 반박할 말이 없어진 것이었다. 부장판사는 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11년 동안 판사 하면서 법정관리 중에 월급 올리는 경우는 처음입니다."

A레저의 직원은 87명으로 관광서비스 업계에서는 작지 않은 규모였다. 이 대표가 부임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조직의 위계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팀장제로 직제를 바꾸고 팀장에게 권한과 의무를 부여했다. 그러자 느슨해진 조직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자재비를 1년에 6,000만 원 이상 절감한 것도 큰 성과였다. 자재 창고에 재고가 있는지 점검하지도 않고 자재를 주문부터 하는 직원들을 보고 재고를 조사한 후 구매하도록 했다. 그러자 구매비가 3분의 1로 뚝 떨어졌다. 직원들 사기도 높였다. 대표적인 예가 환경미화에 투입되는 직원들이었다. 최저 시급 이하로 월급을 받는 것을 보고 30만 원씩 인상해 최저시급에 맞추었다. 그러자 화장실이 눈에 띄게 깨끗해지고 고객을 응대하는 표정이 밝아지면서 민원이 거의 없어졌다. 이런 저런 조치의 결과 A레저는 3년 만에 법정관리를 졸업했다.

은행 시절 터득한 나름의 노하우로 회사 회생

이 대표는 2018년 다시 법정관리에 들어간 회사의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이번에는 경북 영천에 있는 배터리 리사이클링 전문회사 ㈜세기리텍이었다. 2010년에 설립돼 부도 직전까지 갔던 회사였다. 2018년 8월1일에 부임해 1년도 안 돼 채권채무를 모두 정리하고 법정관리를 졸업시켰다. 설립 후 10년 동안 고전을 거듭했고 법정관리 전 4년 동안 직원 임금이 동결되었던 회사였으나 이 대표가 경영을 맡은 지 3년 만인 2021년에 흑자로 돌아섰다. 2022년에는 매출 870여 억원에 순이익 49억을 냈다. 회사 형편이 풀리면서 임금과 직원 복지 수준부터 향상시켰다. 현장직 근로자와 관리직 직원들에게 상여금을 각각 400, 200% 지급했다. 자녀 2명까지 학자금 전액 지급하기로 결정했고, 상여금과 별도로 50만 원의 보너스를 책정했다.

관계자들은 원자재 95%를 수입하는 회사인만큼 코로나19로 물류가 원활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뤄낸 성과여서 더욱 놀랍다는 반응이다. 이 대표는 "은행에 있던 시절부터 체득한 나름의 기준과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운영’이 주효했다"고 밝혔다. 특히 은행에서 대출업무를 할 때 터득한 노하우를 적극 활용했다. 기업에서 대출을 받으러 오면 재무제표 외의 비계량적인 부분을 살폈다. 이를테면, 회사를 방문하면 사장실에 들르기 전 화장실을 살펴보고 근로자들과 인사를 한 뒤 식사는 꼭 구내식당에서 해결했다.

"화장실을 점검하고 근로자들을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면 생산성이 보입니다. 화장실이 지저분하면 직원복지에 신경을 덜 쓴다는 것이고, 직원들이 외부 손님에게 불친절하다는 건 근무 만족도가 낮다는 걸 의미합니다. 당연히 불량률이 높을 수밖에 없죠. 식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8시간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어떤 식사를 제공하느냐에 따라 근로자들의 근무 마인드가 달라집니다. 그런 비계량적인 수치로 회사의 장래성을 판단했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비계량지표에서 승부가 났다. 재무제표만 번듯했던 기업들 모두 수명이 길지 못했다.

구내식당 식대 20% 올리는 것부터 시작

세기리텍에 부임해서 제일 먼저 바꾼 것이 구내식당 식단이었다. 식대를 20% 올렸다. 7시에 출근해 8시간씩 근무하는 근로자들도 그렇지만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직원들은 하루 3끼를 회사에서 해결하는 만큼 식단은 곧 사기와 직결된다는 생각이었다.

관리직 직원의 마인드 개선에도 힘썼다. "현장에 지원하는 부서이지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다"고 못 박은 뒤 "모든 것을 생산현장을 중심으로 돌리겠다"고 선언했다. 지금까지 그 원칙을 꾸준히 견지하고 있다. 경영목표에도 박아넣었다. '주주 가치 극대화'라는 생존 구호 아래로 '재해 없는 사업장 구현' '출근하고 싶은 직장 분위기 조성'을 명시했다.

경영목표에도 명기했지만, 생산현장 중심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제일 먼저 취한 조치는 안전한 근무 환경 조성이었다. 세기리텍은 24시간 제련기가 돌아간다. 4인 1조 3교대 근무 시스템이다. 부임한 다음 날 담당자들을 불러서 "10일 동안 시간을 줄 테니 사고 날 개연성이 있는 시설은 모두 바꾸라"고 지시했다. 그런 조치 이후 개인적인 부주의로 인한 사고 외에는 단 한 건의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직원들의 업무 만족도 역시 향상됐다.

근무 여건을 개선하고 직원들 사기가 진작되자 생산성이 높아졌다. 새로운 설비나 기계 도입도 없이 원자재에서 더 많은 납을 뽑아냈다. 수치로 보면 2018년 50%가 안 되던 생산수율이 56%까지 치솟았다. 원자재 매입률 또한 46%에서 41%로 낮추었다. 직원들 스스로 열정을 가지고 회사일에 임한 결과 원자재는 싸게 구매하고 생산은 더 높아졌다. 그 결과 회사는 자연스럽게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섰다. 이 대표는 그렇게 올린 순수익의 상당 부분을 상여금과 보너스로 지급해 직원들의 사기를 다시 한번 둗우었다. 이 대표는 "일을 열심히 하면 반드시 보상과 성과가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라면서 "직원들 사기를 올리는 것보다 더 확실한 투자는 없다"고 설명했다.

직원들 개인역량 강화도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다. 현장 직원부터 사무실 직원까지 직무 관련 교육 기회가 생기면 업무시간이 빼앗기더라도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물론 비용은 회사에서 모두 댄다.

지난해는 경사가 겹쳤다. 10월에 법정관리를 졸업했고, 12월에는 큰 상도 받았다. 고용노동부가 주관한 '2022년 노사문화유공 정부포상'에서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근로 현장에서 상생·협력의 노사문화 정착과 확산에 선도적 역할을 수행한 유공자를 발굴해 수여하는 상으로 이 대표는 △코로나 위기 고용유지 △비정규직이 단 1명도 없는 회사 △대학교 학자금(2자녀) 전액 지급 △초과 이익 성과급 지급 △정시 퇴근 문화 정착 △외국인 고용 최소화 등 좋은 일자리 창출과 노사상생을 위한 차별 해소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받았다. 이 부문에서 지역 업체가 대통령상을 받기는 처음이다.

경영을 맡는 회사마다 정상궤도에 올려놓으면서 업계에서는 '마이더스의 손'으로 소문이 났다. 이 대표는 "은행원 시절부터 쌓은 보편과 상식이 만든 성과일 뿐, 특별한 기술 같은 건 없다"면서 "그동안 쌓은 노하우를 잘 정리해서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밝혔다.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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