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임시국회에서 ‘쌀값정상화법’이 통과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신정훈 더불어민주당 의원)
“쌀값을 오히려 하락시켜 농업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한때는 불경이 용납되지 않았다. 한국인의 집착은 유난했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막바지인 1992년 당시 대선 후보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개방을 막는 데 직까지 걸어야 했을 정도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쌀은 보호해야 할 전부였다. 정치는 ‘농심(農心)’을 거스르지 못했고, ‘추앙’으로 대동단결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성역’에 일어난 세속화는 극단적이다. 아예 ‘정쟁(政爭)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경쟁에는 성역이 없다고 여기며 비용 대비 효과를 냉정하게 따지는 ‘시장 보수’ 세력의 ‘신앙 공동체’ 이탈이 집권과 더불어 본격화하면서다.
꼬박꼬박 세 끼 밥 먹던 예전에 아무리 신줏단지처럼 모셨어도 지금 쌀은 애물단지 신세다. 매년 수십만 톤이 식탁 대신 창고로 직행한다. 당연시되던 정부의 초과 생산분 매수가 정당하니, 아니니 여야 옥신각신의 대상이 되는 상황 그 자체가 추락한 쌀 위상의 방증이다.
야당인 민주당이 쌀값정상화법이라 명명한 양곡관리법(양곡법) 개정안은 수요를 초과하는 쌀 생산량이 생산량의 3% 이상이거나 햅쌀이 나오기 직전인 단경기(7~9월) 또는 수확기(10~12월)에 쌀값이 전년 대비 5% 이상 하락했을 경우 정부가 의무 매입해야 한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매입 시기ㆍ가격도 ‘수확기’와 ‘시장가’로 명확히 규정했다.
쟁점은 남는 쌀을 적기에 사들여 가격 추락을 막는 일을 민주당이 하자는 대로 정부 의무로 만들 것이냐, 아니면 지금처럼 재량으로 놔둘 것이냐다. 올해 쌀값 낙폭이 역대 최대였는데도 정부가 돈 좀 아껴 보려 우물쭈물하다 실기하고 끝내 쌀 농가를 곤경에 빠뜨렸다는 게 민주당의 인식이다. 하지만 여당인 국민의힘과 정부가 보기에 매입 의무화는 가뜩이나 남아돌아 재정을 잡아먹고 있는 쌀이 더 많이 생산되도록 부추긴다.
전선은 결전이 임박한 모습이다. 위원장이 국민의힘 소속인 법제사법위원회가 두 달 넘게 심사를 뭉개자 지난달 28일 소관 상임위인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농해수위)가 법안을 본회의에 직회부하자는 야당 요구안을 여당 의원 없이 의결했다. 국회의장과 교섭단체 대표 간 합의 기한(30일 내)도 며칠 안 남았다. 여당은 시간을 끌어 볼 요량으로 법안을 도로 법사위로 가져왔지만, 결국 다수 야당 뜻대로 되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제 논에 물 대기 식인 여야의 레토릭(수사ㆍ修辭) 각축에 명분은 희석된 지 오래다. 야당의 전략은 철저한 쌀 농가 영합이다. “농업인이 정부의 저임금과 물가 정책의 희생양으로 지금껏 살았다”거나 “쌀값은 농민의 자존심”이라며 비위를 맞춘다. 민주당의 ‘표밭’이 호남인 데다 농해수위 소속 의원 상당수는 지역구가 농촌이다. “과잉 생산 책임을 농민에 전가하지 말라”는 대정부 질책은 적반하장이라는 게 여당 반박이다. “집권당일 때는 안 한 일을 정권이 바뀌자 밀어붙이며 정부와 농민을 갈라치기하고 정부에 부담을 주려 한다”(주호영 원내대표)는 것이다.
여권도 피장파장이다. ‘무제한’, ‘무조건’ 같은 과장으로 야당 제안과 농민 호소를 폄훼하고, 객관적이기 어려운 국책연구기관의 재정 부담 시뮬레이션 결과를 줄기차게 언급하며 불안감을 자극한다. 4일 농식품부ㆍ해양수산부 합동 업무보고 때 윤석열 대통령이 시사한 거부권 행사 가능성도 양곡법 개정을 둘러싼 여야 갈등을 이전투구 힘겨루기 양상으로 몰아가는 요소다.
쌀은 특별했다. 오랫동안 예외였다. ‘식량 안보’의 보루로 여겨져 와서다. 1970년대 말까지는 쌀 증산이 정부의 지상 과제였다. 없어서 못 먹는 게 밥이었다. 소비 억제까지 정부가 병행했을 정도다. 특별 대우는 쌀이 남기 시작한 80년대 이후에도 지속됐다. ‘관세화’의 사실상 유일한 예외도 쌀이었다. 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과 함께 개방의 한파가 모든 농산물을 덮쳤지만, 쌀 농가와 쌀 농업은 정부가 둘러쳐 준 울타리 안에서 소득 보장과 성장의 기회를 얻고 승승장구했다.
과유불급이었을까. 80년대 중반부터 쌀 소비가 가파르게 감소하며 금세 수급이 역전됐고, 격차가 벌어졌다. 70년 136.5㎏으로 정점을 찍은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은 98년부터 100㎏을 밑돌더니 2021년 56.9㎏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쌀값은 2000년대 중반에야 오름세가 꺾였다. 근 20년간 소비보다 생산이 많았지만 가격이 버텨 줬고, 구조조정은 미뤄졌다. 비싼 가격이 소비자 외면의 가속화에 한몫했다는 분석도 있다. 몰락의 전조였다.
쌀 농가는 억울할 수 있다. 공급 과잉을 조장한 것은 정부다. 하지만 정부도 사정이 있다. 수입 없이 국내에서만 수급이 맞춰지는 품목은 모자라면 곤란하다. 남는 편이 낫다. 쌀이 그랬다. 정부는 2000년쯤까지 증산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정부 주도나 지원으로 여러 기관이 설치돼 쌀 생산을 지원했다. 물가 안정을 위해 싸게 팔았고, 비싸게 사서 농가 소득을 보장했다. 감내해야 하는 불합리였다.
기껏 키워 놓은 관성은 감산의 최대 걸림돌이다. 부메랑인 셈이다. 정부가 초과 생산분을 제때 제값에 사 주는 한 쌀농사만큼 농가에 안전한 선택은 없다. 다른 작물 재배보다 수익성이 약간 떨어져도 사실상 완전히 기계화한 터라 ‘가성비(가격 대비 효율)’가 워낙 좋다. 무임승차는 농가 입장에서 나름대로 합리적 결정이다. 하지만 대가는 특혜 시비다. ‘농 대 농’ 구도다. “재정이 쌀에 집중되면 나머지 품목 투자가 줄어든다”며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곳도 농업인 당사자 단체들이다.
정부 실패는 예견됐다. 가격을 떠받치며 감산을 유도하는 모순된 농정을 펴 왔기 때문이다. 양곡법 개정은 이런 난맥을 바로잡기는커녕 더 어지럽힐 공산이 크다는 게 정부 인식이다. 농민에게도 이로울 게 없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예측에 따르면, 양곡법 개정안이 시행될 경우 쌀값은 더 떨어진다. 올 수확기 기준 18만 원가량인 80㎏당 가격이 2030년에는 17만3,000원 정도가 된다. 초과 생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장만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주량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선임연구위원은 “국내 필요 식량 20~25%의 영토 내 생산이 가능한 수준까지 농업ㆍ농촌ㆍ농민 기반이 유지돼야 하는 한국에 쌀 산업은 핵심 축”이라며 “소득 창출 면에서 1차 산업의 한계가 명확한 만큼 소득 보장 차원의 정책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관건은 개입의 정도다. 가급적 시장에서 수급 균형이 이뤄지도록 어느 정도는 놔둘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 사이의 중론이다. 서세욱 국회예산정책처 사업평가심의관은 “인위적 가격 지지를 위한 개입은 정부가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생산 조정(감산)이나 공급 통제(시장 격리) 노력이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은 선진국의 경험칙이다. 김한호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미국이 시행착오를 거쳐 회귀한 농가 소득 보장 방식이 생산과 연계되지 않는 직접 지불”이라고 소개했다.
다만 가격 충격이 농가의 경영을 위태롭게 만들지 않도록 보완 장치를 갖추는 것은 정부 몫이다. 김명환 ‘GS&J 인스티튜트’ 시니어 이코노미스트는 “실제 가격이 기준가보다 낮으면 차액을 보전해 주는 ‘가격 위험 완충제도’를 도입하되 반드시 최근 수급 상황을 기준가에 반영해 과잉 생산 유인을 차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쌀 생산 기반을 유지하려면 내수만으로 부족하다는 진단도 있다.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은 “수출 전용 쌀 생산단지를 만들고 지원하는 것도 해 볼 만한 정책 시도”라고 강조했다.
소비자가 다시 돌아오게 하려면 발상의 전환도 긴요하다. 예컨대 식량의 양적 확보는 대농(大農)이 담당하고, 소농(小農)은 고품질 고가 제품 생산에 주력하며 다양성을 책임지는 프랑스식 역할 배분 구조가 전범이 될 수 있다. 박진도 충남대 명예교수는 “식량 안보를 위한 논 규모를 유지하려면 단위면적당 수확량을 줄이고 고급화하는 길로 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당장 시급한 것은 정치권의 생산적 논의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양곡법 개정을 둘러싼 정치권의 대립은 농업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소모적 갈등일 뿐”이라며 “민주당 법안의 논 타작물 재배 지원 사업과 정부의 전략작물 직불제처럼 비슷한 구상의 공통분모를 찾으려는 노력이 요구된다”고 충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