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은 이미 많이 늦어진 연금개혁의 원년이 될 것입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올해 신년사)
저출생∙고령화 시대에 연금개혁은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연금제도를 손보지 않으면 미래 세대는 돈을 더 내고도 덜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연금개혁은 거센 반발과 갈등을 수반한다. 연금 수령자 입장에선 당장 받을 것으로 기대한 돈을 빼앗기거나 늦게 받는 셈이기 때문이다. 여론을 먹고사는 정치인들, 특히 집권 세력은 '잘해야 본전'인 연금개혁을 최대한 시도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도 마크롱 대통령은 2027년까지인 정권 임기 안에 연금개혁을 관철시키겠다고 벼르고 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지지율이 추락해 국정 동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할 수 있는 '시한 폭탄 이슈'이지만, 프랑스의 미래를 위해선 불가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마크롱 정권이 연금개혁을 어떻게 풀어 가는지는 "연금개혁을 더 미뤄서는 안 된다"고 단언한 윤석열 대통령의 구상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마크롱 대통령은 속도전을 예고했다. 이달 10일(현지시간) 정부가 마련한 연금개혁 초안을 공개한 뒤 사회적 논의를 거쳐 올여름 즈음엔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겠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다.
정부안의 핵심은 '법정 정년(연금 수령 연령)을 현행 62세에서 65세로 올린다'는 내용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년(만 60세)과 연금 수령 연령(만 65세)이 다른 한국과 달리 프랑스에선 정년을 채우자마자 공적 연금을 받는다. 연금을 받기까지 3년 더 일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년 1년에 4개월씩 은퇴 연령을 늦춰 2031년까지 은퇴 연령 65세를 안착시키는 방안이 거론된다. 은퇴 연령을 64세로 조정할 가능성도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속도를 내는 건 연금 재정이 현행 제도를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 연금자문위원회는 지난해 하반기 보고서에서 '2023년부터 연금이 적자로 접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매년 적자 폭은 국내총생산(GDP)의 0.5~0.8% 수준으로 추산했다. 매년 19조~30조 원의 적자를 국가가 충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프랑스의 평균 은퇴 연령은 다른 선진국보다 낮은 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프랑스인들의 은퇴 연령은 남성 60.4세, 여성 60.9세로 미국(남성 64.9세∙여성 64.7세), 독일(남성 63.1세, 여성 63.2세), 일본(남성 68.2세, 여성 66.7세) 등보다 낮았다.
그러나 국민의 반발이 문제다. 마크롱 정부는 3, 4일 노동조합 등과 사회적 대화에 나섰지만, 노동자들은 연금개혁 자체를 거부한다. 연금 수급 연령을 늦출수록 재산이 별로 없는 서민·중산층과 저소득자에게 불리하므로 사회가 더 불평등해질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온건파로 분류되는 민주노동동맹(CFDT) 로랑 베르제 위원장은 3일 "64세든 65세든, 은퇴 연령을 높인다면 대규모 시위와 파업을 하겠다"고 경고했다.
마크롱 대통령으로선 국정 동력을 건 중대 모험이다.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전문기관 해리스인터랙티브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54%가 당장의 연금개혁에 반대했다. 높은 물가 상승률을 비롯해 경제 상황이 어렵다는 점도 마크롱 대통령 입지를 좁힌다.
마크롱 대통령은 집권 1기 때인 2019년 연금개혁을 추진했다가 전국적인 반대 시위와 파업에 굴복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치명상을 입게 되지만, 물러서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연금개혁은 대통령 재선에 성공한 지난해 4월 대선 때 그가 내건 핵심 공약이다.
프랑스인들도 연금개혁의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다. 해리스인터랙티브의 같은 조사에서 응답자의 과반이 "연금개혁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이 같은 여론을 얼마나 우군으로 만들 수 있느냐에 따라 마크롱 정권의 명운이 결정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