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감기약 600만 원어치를 사갔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나요?”
2일 서울 종로5가 약국거리에서 만난 약사들은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했다. ‘중국인들이 감기약을 싹쓸이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반응이었다. 최근 중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 환자가 급증하자, 정부는 감기약 사재기 방지를 이유로 판매수량 제한 등 대응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의약계는 “사재기 조짐은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외려 정부의 섣부른 대책이 ‘가수요(지금 당장 필요가 없어도 일어나는 예상수요)’만 자극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이번 사태는 지난달 말 경기 하남시에서 불거졌다. 하남 망월동의 한 약국에서 중국인 한 명이 여행용 가방에 감기약 600만 원어치를 구매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여러 매체를 통해 재생산됐다.
결과적으로 이 보도는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다. 하남보건소가 구청 의뢰를 받아 망월동 약국 39곳을 전수 조사해 보니, 저 정도로 감기약을 대량 판매한 약국은 없었다. 상식적으로 600만 원 분량의 감기약을 보유한 약국 자체를 찾기도 어렵거니와, 이를 여행용 가방에 한 번에 담는 것 역시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보도가 계속되자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30일 식품의약품안전처, 관세청과 함께 ‘감기약 사재기 근절 대책’ 시행 계획을 발표했다. 이튿날엔 대한약사회가 약국의 의약품 대량 판매 자제를 권고하는 캠페인을 시작하며 보조를 맞췄다.
현장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본보가 종로5가 약국과 중국인들이 많이 사는 영등포구 대림동, 경기 일대 등의 30여 개 약국을 둘러본 결과, 사재기로 감기약이 품절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대림동 약사 A씨는 “중국에 있는 가족ㆍ지인에게 보낸다며 약을 사가는 사람이 늘긴 했지만 그래봐야 한 번에 3~5통으로 통상적 수준”이라고 했다. 종로5가 약사 B씨도 “코로나19 유행이 길어지면서 감기약 공급이 불안정해진 지는 꽤 됐다”며 “독감 시즌이라 감기약을 찾는 사람이 조금 많아진 ‘계절적 수요’ 말고는 별반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다.
정부의 설익은 대응은 국내에서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된 2020년 초 ‘마스크 대란’ 교훈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는 분석이다. 당시 정부가 수급 관리에 실패해 마스크를 파는 전국 곳곳의 마트나 약국 앞에 수백m 줄이 선 풍경이 익숙했다. 과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정부도 나름 발 빠르게 움직인 셈이다.
하지만 정확한 조사에 기반하지 않은 정부 대처는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정부가 먼저 나서 수급 불균형을 경고하자, 불안감을 느낀 시민들의 사재기 심리도 덩달아 커진 것이다. 단적으로 최근 며칠 사이 내국인들의 구매 수량이 늘었다는 게 약사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경기 부천의 C약사는 “새해 들어 당장 아픈 것도 아닌데 약을 사다 놓거나 1개를 구매하려고 했던 손님이 미리 사둬야겠다며 3~5개씩 달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가수요가 늘면 약이 진짜 필요한 감기나 독감, 코로나19 환자 등이 피해를 볼 수 있다. 신속한 대응이 감염병 확산 억제의 성패를 좌우하는 건 맞지만, 좀 더 정교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정부는 조만간 업계 의견 등을 종합해 감기약 판매 제한에 관한 세부 기준을 결정할 예정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감기약 비축량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싹쓸이 지적이 반복적으로 제기돼 정부가 선제적 조치를 고민한 것”이라며 “‘약은 적절하게 처방돼야 한다’는 원칙을 되새기는 정도로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