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피부에 액체를 뿌려서 동작을 감지할 수 있는 차세대 전자피부(electronic skin) 기술을 국내 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부피 부담이 없으면서도 사람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어, 증강·가상현실이나 원격의료 분야 등에 널리 활용될 수 있는 기술이다.
29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조성호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 연구팀, 고승환 서울대 교수 연구팀, 제난 바오(Zhenan Bao) 미 스탠포드대 교수 연구팀 등은 전도성 액체로 손 위에 전자피부를 프린팅한 뒤 인공지능(AI)을 통해 움직임을 측정·활용하는 '차세대 지능형 인공피부 기술'을 개발했다. 연구팀의 성과는 이날 국제학술지 '네이처 일렉트로닉스'에 게재됐다.
전자피부는 원래 딱딱한 전자소자를 피부처럼 유연하게 늘릴 수 있는 형태로 구현하는 기술이다. 전자피부를 사람 피부에 붙이면 △인체의 움직임을 측정할 수 있고 △혈압·혈당·혈류량·산소포화도 등의 건강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할 수 있으며 △환자 상태에 따라 미량의 약물을 적시에 투입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개발된 전자피부는 부피가 크거나 유연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차세대 기술을 쓰면 시계나 밴드 형태가 주류인 웨어러블 기기를 피부에 딱 붙이는 형태로 간편화할 수 있다.
조 교수 팀 등이 개발한 차세대 지능형 인공피부 기술은 패치 형태가 아닌 전도성 나노망사를 활용했다. 전도성 액체를 피부에 직접 분사한 후 나노미터(㎚) 단위의 전도성 그물망을 손에 자동으로 인쇄하는 방식이다. 이 인공피부는 움직임에 따라 피부가 늘어나는 정보를 전기신호로 전환, 블루투스 장치를 통해 AI로 전송한다.
그러면 AI 프로그램이 전송된 전기신호를 스스로 학습해, 사용자의 움직임을 인지하게 된다. 조성호 교수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손등에서 발생하는 신호는 미묘하게 다른데, 그 신호들을 구별하고 실제 행위를 추론할 수 있도록 AI 알고리즘을 학습시켰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이 기술을 활용하면 키보드 본체 없이 허공에 손가락만 까딱거리면 PC에 실제 글자를 입력할 수 있다. 타이핑 속도 면에서 아직 한계가 있지만, 전자피부 범위를 손가락 전체로 확장하는 등 기술 수준을 높이면 매우 빠른 타이핑까지 정확하게 구현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 특정 물체를 문지르는 것만으로 물체의 모양이 화면에 그려지게 할 수 있다. 적은 정보만으로 움직임을 인지하기 때문에 일반 PC나 스마트폰에서도 구현할 수 있다.
연구팀은 이 기술이 메타버스나 원격의료 분야에서 널리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조 교수는 "이번 연구는 전자피부와 최신 AI 기술을 결합한 첫 사례"라며 "증강·가상현실, 원격의료, 로봇공학 분야에서 기술 혁신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과기정통부 기초연구사업(중견연구 및 선도연구센터) 등의 지원으로 수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