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도 아찔한 잔도... 제갈량의 중원 진출 관문

입력
2022.12.03 10:00
<105> 쓰촨 ⑤랑중고성과 검문관

조조가 한나라의 일등공신 한신에 비유한 장군이 있다. 장합이다. 정사 ‘삼국지’에 나오는 기록이다. 서기 215년 선봉장 장합은 촉나라를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한다. 유비는 장비를 보내 맞서게 했다. 장합은 군대를 물려 후퇴했다고 담백하게 기록했다. 소설은 훨씬 드라마였다. 패장 장합은 조조의 사면령 덕분에 겨우 사형을 면했다. 장비는 ‘조조의 한신’을 물리치고 7년이나 랑중(閬中)을 지켰다.

삼국지 역사 뜨끈뜨끈... 장비의 도시 랑중고성

랑중고성 서쪽에 한환후사(漢桓侯祠)가 있다. 환후는 장비의 사후 시호다. 사당 앞에서 갑옷을 입고 창을 든 장비가 방문객을 환영하고 있다. 관광객을 위한 서비스라 창칼을 들고 서로 싸우는 장면을 연출한다. 기념사진으로 영락없다. 장비가 사망하자마자 사당을 세웠으나 곧 훼손됐다. 청나라 시대인 17세기 초 중건할 때 철로 만든 사자가 대문을 지키고 있었다. 항일전쟁 중에 일제의 비행기 폭탄 투하로 상처를 입었다. 문화혁명 시절에 완전히 망가졌다. 최근에 돌로 다시 만든 사자 한 쌍이 보인다.


적만루(敵萬樓)는 명나라 시대인 15세기 중반에 건축했다. 2층에 걸린 만부막적(萬夫莫敵)은 ‘1만 명이 덤벼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장비에 대한 존경이다. 타이완의 양돈 협회가 기증했는데 이상한 일은 아니다. 장비는 한나라 유방의 무장인 번쾌와 더불어 도살꾼의 조사(祖師)로 대우받는다. 1층의 영휴석혁(靈庥舄奕)은 ‘여기 영령이 쉬고 있으니 족적이 대대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누각 뒤에는 용맹한 신하이고 어진 목민관이라는 호신양목(虎臣良牧)을 걸었다. 2층에 새긴 웅위(雄威) 필체도 돋보인다. 명나라 시대 장비묘는 웅위묘라 불렸다.

누각 안에는 모두 4명의 조각상이 있다. 차남 장소(張紹)는 관모를 떠받치고 장손 장준(張遵)은 칼을 쥐고 있다. 문무를 겸비했다는 추앙이다. 부하 장수인 뇌동과 오반은 갑옷을 받쳐 들고 있다. 정사나 소설에서 활약이 두드러지지 않은 인물이라 조금 낯설다. 둘 다 장비와 함께 랑중을 지켰다. 뇌동은 장합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전사한다. 오반은 장비 사후 제갈량의 북벌에 참가해 전공을 세우고 장군에 임명된다.

대전에 앉은 장비가 낯설다. 용맹하고 다혈질의 무장이 아니던가. 중국에서 유일하게 문신 자태인 조각상이다. 면류관을 쓰고 두 손으로 여의(如意)를 모은 모습이 의심할 필요도 없이 문관이다.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도리를 지켜 선정을 베푼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농사와 수공업에도 해박한 지식을 지녔기에 평화의 시대를 선사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피비린내 전투가 랑중에는 없었다. 출중한 재능을 발견해 유비에게 천거한 마제가 병서를 들고 있다. 장남 장포(張苞)도 긴 창을 들고 있다.


묘정(墓亭)의 장비는 무장의 용모다. 표범 같은 머리, 부리부리한 두 눈, 제비 같은 턱, 호랑이 수염이라는 설명이다. 철로 주조됐는데 문화혁명 시절 훼손돼 다시 흙으로 제작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장달과 범강의 불쌍한 모습이 보인다. 주군을 살해하고 수급을 가지고 달아났으니 영원히 엄벌을 달게 받고 있다. 소설에서 읽었을 때보다 훨씬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두 배신자는 장비의 수급을 가지고 오나라로 투항할 생각이었다. 손권이 유비와 강화를 추진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수급의 가치가 사라지자 장강에 버렸다. 얼마 후 그물에 걸린 수급이 떠올랐다. 장강 도시 윈양(雲陽)과 랑중에 수급과 몸이 나뉘어 묻혀 있다. 영혼이 묻혔다는 고향 줘루(涿鹿)의 장비묘에 가면 살해당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수급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 깜짝 놀랐다.

무덤은 높이 8m로 꽤 높다. 가로 25m에 세로 42m의 타원형으로 넓기도 하다. 무덤을 한 바퀴 돌며 이렇게나 큰 무덤이 황릉 말고 또 있었나 생각해본다. 의형제인 관우와 유비도 미치지 못한다. 수백 년 이상 자란 거목과 싱그러운 풀이 뒤덮고 있다. 무덤이 크다고 더 훌륭한 인물은 아니다. 무덤을 조성할 당시 위상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장비 브랜드의 소고기(牛肉) 간판이 보인다. 장비 가면을 포장지로 한 말린 소고기도 많다. 소고기 국수인 장페이뉴러우몐(張飛牛肉面)도 명물이다. 면은 여느 국수와 대체로 비슷하다. 국물도 구수하지만 소고기 맛이 최고다. 부드럽게 부서질 듯 잘 씹히고 조금 짜다. 소금기가 입맛을 망칠 정도는 아니다. 장비 소고기는 육즙을 건조해 말렸지만 딱딱하지 않아서 좋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절묘한 맛이 장비 소고기의 진면목이다.

국수와의 궁합은 추(醋)라 할 수 있다. 식초와 간장이 섞인 양념이다. 국수나 만두를 먹을 때 뿌리거나 찍어 먹고 요리할 때도 쓰니 소비량이 엄청나다. 밀가루, 쌀, 찹쌀 등 곡물을 원료로 약재를 넣고 발효한다. 바오닝부(保寧府)의 중심이 바로 랑중이었다. 바오닝추(保寧醋)를 판매하는 가게가 수두룩하다. 물레방아와 맷돌을 꾸미고 여러 갈래로 흘러내리니 향긋한 냄새가 진동한다. 수공으로 만든다는 증명이다.


길게 뽑은 면을 나뭇가지에 걸고 말리는 집이 보인다. 줄줄이 하얗게 늘어선 면을 보니 그냥 지나가기 어렵다. 소고기 국수에 바오닝추를 넣고 먹는다. 금상첨화라 할만하다. 수공으로 뽑은 면도 제격이다. 쫄깃한 면과 부드러운 소고기, 추 맛까지 감돈다. 삼위일체 그 자체다. 국수 한 그릇만으로도 고성 유람한 보람이 있다. 살포시 가라앉은 삼국지 역사가 뜨끈한 입김으로 후루룩 살아난다.

천북도공원(川北道貢院)이 있다. 청나라 시대 쓰촨 일대를 포괄하는 과거시험장이다. ‘명사(明史)’에 선비가 시험을 치르는 장소를 공원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공(貢)은 인재를 조정에 천거한다는 말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용문이 나온다. ‘잉어가 용문을 뛰어오른다’는 이어약용문(鯉魚躍龍門)은 황하의 폭포를 거꾸로 치솟는 잉어에 대한 비유다. 과거를 통과하는 일이 어렵다는 뜻이다. 공원이 있으니 문묘도 있고 행정기관인 천북도서(川北道署)도 있다.


고성을 걷다 보니 거리가 참 재미있다. 학도가(學道街)를 돌아가니 장원가(狀元街)이고 다시 무묘가(武廟街), 양목가(良牧街)가 나온다. 문무가 함께 어울린 거리다. 동서남북 방향에 위치한 거리도 있다. 거리를 잇는 골목마다 저택과 민가가 골고루 잇닿아 있다. 이리저리 발길 닿으면 그냥 걷는다. 고성 중심에 위치한 3층 누각인 중천루(中天樓)를 지난다. 남쪽으로 걸어가니 화광루(華光樓)도 나온다. 갑자기 악기 소리가 진동을 한다. 장비를 가마에 태우고 깃발 들고 행진을 한다. 그야말로 장비의 세상이다.

검문관 두부는 쓰촨에서도 최고

북쪽으로 150㎞ 떨어진 젠거현(劍閣縣)으로 간다. 다시 지방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10㎞ 정도 시내버스로 이동하니 검문관(劍門關) 종점이다. 날카로운 칼날만큼이나 좁은 관문이니 누가 지나갈 수 있으랴. 등산로를 보고 심란해졌다. 애초에는 1~2시간 정도 보고 다음 행선지로 갈 예정이었다. 지도를 보니 이백이 ‘촉도난(蜀道難)’을 읊은 뜻이 불현듯 떠오른다. 등산로를 보니 심장이 뛴다. 일정 변경!


아이고! 噫吁嚱!
험하고 높구나! 危乎高哉!
촉으로 가는 길이 어렵구나 蜀道之難
하늘 오르기보다 어렵구나! 難於上青天!
이백의 ‘촉도난(蜀道難)’


하늘은 푸르다. 이백의 과장처럼 지독하게 높아 보인다. 얼마나 험준한 지는 가보면 알겠지만 적어도 하늘 아래 암반일 뿐이다. 거대한 절벽은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등장하는 ‘북부의 장벽’ 같다. 일정을 바꿨지만 갈등이다. 입장권을 구매하며 물었다. “얼마나 걸리냐?” 괜히 물어봤다. 5~6시간은 각오하라고? 다시 바꿀 수는 없다. 마음속 다짐도 계찰괘검(季札掛劍·신의를 지킨다는 의미의 고사성어) 아니던가.

지형만큼 유명한 음식이 있으니 바로 두부다. ‘검문관 들러 맛보지 않으면 억울하다’는 속설이 있다. 100가지가 넘는 두부 요리는 맛도 맛이지만 보는 즐거움도 있다. 볶고, 튀기고, 끓이고, 찌고, 지지고, 무치고, 푹 삶는다고 하니 별의별 요리가 상상할 수 없이 많은가 보다. 두부연(豆腐宴) 한 상에 108위안, 128위안이라 적은 깃발이 사방에서 유혹한다. 혼자라 아쉽다.

‘검문관 두부가 쓰촨 최고’라니 그냥 돌아가고 싶지 않다. 걱정을 해결했다. 국수와 잘 어울린다고 한다. 새빨간 국물에 부드러운 면, 무엇보다 두부가 명불허전이다. 매워 보이는 국물도 두부의 부드러운 맛과 어울려 담백하다. 훌륭한 두부 맛이면 검문관은 충분히 오를 수 있겠다 싶다. 두부 식당에 짐을 맡기고 출발!

등산로를 따라 오르자마자 촉나라 대장군 강유의 사당이 나온다. 평상후사(平襄侯祠)다. 위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오자 검문관을 굳게 지켰다. 제갈량이 후계자로 지목할 정도로 문무를 겸비한 장군이다. 사당 뒤에 의관총이라 주장하는 강유묘가 있다. 여러 도시가 진정한 강유의 무덤이라고 논쟁 중이다. 고향과 사망 장소도 있지만 전투의 현장이니 승부를 걸어 볼만하다.

원숭이도 쉽지 않은... 오싹 아찔한 검문관 잔도


고개를 넘어가니 천제협(天梯峽)이 나타난다. 깊디깊은 협곡을 건너가야 하는데 걱정이다. 생각보다 가파르고 계단도 많다. 잔도 따라 한참 내려가서 계곡을 끼고 상류로 올라간다. 협곡을 잇는 나무다리를 건넌다. 출렁거리는 느낌이 든다. 다리 중간에 잠시 서니 양쪽으로 암반이 절벽처럼 서서 소리치는 듯하다. 바람소리도 들리고 전쟁터의 함성도 들리는 듯하다.

지그재그로 만든 잔도를 오른다. 가파르기가 장난이 아니다. 솔솔 불어오는 송풍이 밀어주지 않으면 숨이 차서 어떻게 오를까 싶다. 장수 한 명이 아니라도 쥐새끼 한 마리 통과하기 어려워 보인다. 북송의 재상 왕안석도 검각천제만리한(劍閣天梯萬里寒)이라며 오싹한 전율을 고백했다.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백은 검각쟁영이최외(劍閣崢嶸而崔嵬)이라 했다. ‘험준하고 가파르며 높고 우뚝하다’고 했다. 뒤이어 일부당관(一夫當關), 만부막개(萬夫莫開)라 했으니 유명세가 하늘을 찔렀다. 바로 여기다. ‘잔도가 꼬리를 물고 엮여 있다’는 뜻으로 천제석잔상구연(天梯石棧相鉤連)이라고도 했다. 1,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할 리 없다.

정자 두 군데에서 잠시 쉬고 크고 작은 동굴도 슬쩍 관람하면서 등산한다. 1시간을 계속 오르고 또 오른다. 정상 가까이 다가가니 넓은 평지가 나온다. 평평한 땅이 있다니 놀랍다. 더 놀란 일은 공중에 붕 뜬 관망대다. 유리로 빙 둘러 있어 허공에서 바둥바둥거리는 느낌이다. 오금이 저려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발도 바라보기 어렵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유리를 통해 겨우 절벽 아래가 보일 뿐이다. 오른쪽을 바라보니 마마애(媽媽崖)라 부르는 절벽이다. 산 이름도 있어 대검산(大劍山)이라 부른다. 약 1억 년 전 백악기에 형성된 수직 절벽이다. 너무 무서워 ‘엄마야(媽呀)’라 놀라 소리친다는 이름이다.

진짜 놀랄 일은 아직 시작도 아니다. 하산 길이 양 갈래다. 케이블카 타는 곳과 선녀교(仙女橋)다. 선녀를 만나러 가는 길은 조도(鳥道)로 연결된다. 새가 다니는 길이라는 경고다. 나무 기둥과 철망이 아니라면 지나갈 엄두도 내기 어렵다. ‘돌아가자’는 말이 남발한다. 중간 정도 가자 후회막급이다. 앞뒤로 행렬이 이어진다. 오도 가도 못할 바에 그냥 원숭이 흉내라도 내며 엉금엉금 가야 한다.


이백은 오로지 ‘조도로만 질러갈 수 있노라’ 했다. 이어서 ‘황학도 날아서 통과하지 못하고 원숭이도 붙잡고 지나가려니 고민이네’라고 했다. 엄살이나 공갈이 아니다. 절벽 옆으로 한 사람 겨우 지날 정도다. 가파른 하산 길이 오히려 안전하다. 앞선 사람들이 너무 조심스럽고 허둥대는 바람에 더 조마조마하다.

거의 내려오니 감나무가 있던 시수평(柿樹坪)이 나온다. 천제협에서 흘러내린 도랑이 흐른다. 다리를 건너니 완전 평지다. 등산 일주를 마치니 관루(關樓)가 보인다. 촉으로 들어가는 인후(咽喉)다. 요충지라는 말이다. 천하제일인 애구(隘口)다. 잘록하게 생긴 골짜기라면 역시 요충지다. 외부의 적을 대비하기에 최상의 조건을 갖춘 관문이다.

2층의 천하웅관(天下雄關)이나 3층의 웅관천참(雄關天塹) 모두 검문관의 웅장한 위엄을 드러낸다. 제갈량과 강유가 북벌을 위해 중원으로 나가던 관문이다. 마찬가지로 위나라가 촉나라를 정벌하러 지나갔다. 1,700년 역사를 지녔고 훼손과 중건을 반복했다. 2008년 쓰촨 대지진으로 훼손된 후인 2009년 중건했다.

입구로 돌아왔다. 아담한 석패방이 인사를 한다. 기둥에 적힌 대련은 또 이백이다. 상황서순남경가(上皇西巡南京歌) 연작시에 나오는 문구다. 당나라 현종이 안녹산의 반란으로 청두까지 피신했다. 그 고충을 담았다. 검문관에 오기 전에 양위한 상태라 상황이었고 당시 청두는 남경이었다.

총 10수 중 첫 수의 제3연과 제4연을 새겼다. ‘검문관 절벽은 오천 척’이라는 의미의 검벽문고오천척(劍壁門高五千尺)과 ‘돌로 쌓은 누각이 열어젖힌 구중궁궐’이라는 뜻의 석위누각구천개(石爲樓閣九天開)다. 유난히 이백으로 도배된 느낌이다. 시 하나 잘 쓰면 천년이 훌쩍 지나도 이름을 빛낼 수 있다. 검문관에서 땀을 흘리고 나니 시향(詩香)이 참 진국이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