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허무로 시작해 산책으로 끝난다. “잘 사는 사람은 허무를 다스리며 산책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삶을 원한다. 산책보다 더 나은 게 있는 삶은 사양하겠다.” 이질적인 두 단어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건 글쓴이가 김영민 서울대 교수라서다. 깊은 사유로 독자들을 매료시킨 김 교수가 책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통해 삶의 의미를 탐구했다.
전화로 만난 김 교수는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삶을 잘 살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무의미한 성공, 곧 사라질 욕망, 남들이 하기에 나도 해야 한다는 불안에서 벗어나 유연하게 산책하듯 살자는 다독임이다. 남들이 정해놓은 목표를 따르지 않고 순간을 즐기자는 속삭임이다. 그 위로에 공명한 듯 책은 출간 후 대형서점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올랐다.
김 교수가 책에 “허무는 인간 영혼의 피냄새”라고 쓸 만큼 인생의 허무는 동서고금의 화두였다. 조선 시대 문인 홍세태(1653~1725)는 배 위에서 술과 경치를 즐긴 다음 “잘 놀고 흐뭇했어도, 일이 지나고 보면 문득 슬프고 쓸쓸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스페인 몬세라트 수도원이 소장한 무도가(舞蹈歌) 필사본에는 “우리는 서둘러 죽음을 맞이하러 가네. 더 이상 죄를 범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써 있다.
하필 정글 같은 한국 사회에 태어나, 허무를 느낄 가능성은 더 크다. 김 교수는 통화에서 “한국 사회는 여러 목적과 동원이 과도한 사회라는 인상이 든다. 가령 대학 입시 같은 것이다. 성취를 해도 문제고, 못 해도 패배감에 시달린다. 목적도 중요하지만, 삶을 돌보는 게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삶을 돌보는 방법은 현재를 온전히 즐기는 것이다. 영화 ‘쉘위댄스’(2000)의 주인공 스기야마처럼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을 내려놓고 몸과 마음을 유연하게 푸는 게 우선이다. 파트너와 합을 맞추듯 인생에서 맞닥뜨린 상황을 부드럽게 대처해 보자. 아울러 달콤한 디저트와 산책하기. “이런 것들은 적어도 그 순간에 집중하게 해 주는 것 같다. 살고 있는 순간으로 잠깐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치유의 효과를 가진 활동이다.”
충분히 탐닉하되 ‘마음의 중심’은 지켜야 한다. 춤을 추되 정신줄은 잡고 있자는 얘기다. 이성을 잃고 게걸스럽게 디저트를 흡입해서도 안 된다. “인생을 즐기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환멸을 피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에 파묻히지 말아야 한다.”
미술과 건축, 종교와 영화를 넘나드는 책은 휙휙 넘어간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훈계하기보다, 여러 텍스트를 보여주며 스스로 생각을 가다듬도록 안내한다. 김 교수는 통화에서 “이런 인문학적 텍스트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석하고 허무함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나는 진주가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내 살결이 너무 하얗기 때문에, 내 목에 어울릴 것 같지 않다”는 문장처럼, 허를 찌르는 유머 감각도 여전하다.
김 교수는 정치외교학부 교수다. 구제불능 같은 정치가 주는 허무함은 어떻게 다뤄야 할까. 정권이 바뀌어도 짜릿함은 한순간뿐이거늘. 김 교수는 통화에서 "너무 정치에만 몰두하면 정치적 결과에 삶이 크게 흔들린다. 보다 큰 삶의 일부로 바라보길 희망한다"고 했다. "책에서 강조한 것처럼 많은 것들에 아이러니가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크게 실망하거나 기뻐할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