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 꼬부랑 글씨"... 지자체 보도자료까지 점령한 외국어

입력
2022.10.1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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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단체 보도자료 외국어 남용 절반 넘어
간판·무인주문기도 영어 홍수... 세대 장벽↑
"언어 공공기능 고려해 한글 쓰기 노력 필요"

제576돌 한글날을 맞은 9일. 서울 종로 거리를 둘러보니 한글로 된 간판을 찾는 게 더 어려웠다. 외국어는 사실 우리 일상에 스며든 지 오래다. 그럼 ‘K-푸드관(한국 음식관)’, ‘그린 라이프(친환경 생활)’, ‘바이어와 셀러(구매자와 판매자)’, 이런 명칭은 어디에 사용됐을까. 놀랍게도 광역자치단체들이 언론사에 배포하는 보도자료에 버젓이 나온다. 얼마든지 한글로 써도 된다.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가는 우리말 사용에 앞장서야 할 정부기관마저 외국어를 남용하는 현실이다.

보도자료 외국어 남용률 70% 넘기도

한글문화연대가 6ㆍ1 지방선거 이후 2개월간 17개 광역단체에서 낸 보도자료를 분석해 보니 총 4,299건 중 불필요한 외국 용어나 글자로 표기된 자료가 2,322건에 달했다. 절반(54.0%)을 넘는다. 정부와 지자체 문서는 국민이 알기 쉽게 한글로 쓰라고 법(국어기본법 14조)에 명시돼 있다. 법이 아니더라도 정책 수혜자인 모든 국민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로 쉽게 풀어 쓰는 건 상식이다.

현실은 규정과 동떨어져 있다. 부산시의 보도자료 외국어 남용 비율은 무려 74.8%에 달했다. 전국 광역단체 중 가장 높다. 목욕 용품을 굳이 ‘바스(bath)’로 쓰거나 ‘로드맵(road mapㆍ이행안)’, ‘슬로건(sloganㆍ표어 혹은 구호)’처럼 한글 대체어가 있는 데도 외국어를 앞세우기도 했다.

보도자료뿐만이 아니다. 일부 지자체 사업 이름도 외국어로 도배돼 있다. 서울시가 서울교통공사와 함께 지하철 역사 내 공간을 의원ㆍ약국으로 운영하는 사업 명칭은 ‘메트로 메디컬 존’이다. 8월 마포구 월드컵공원에서 진행된 ‘별빛캠핑’ 홍보물엔 “‘슬로우 모먼트’ 주제로 느림 속에서…”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박철우 안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한자와 영어가 뒤섞인 정체불명의 용어가 무분별하게 사용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면서 “알기 쉬운 용어로 바꿔 표기하려는 지자체의 노력이 아쉬운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언어 장벽에 소외되는 중장년층

범람하는 일상 속 외국어의 폐해도 커지고 있다. 외국어나 신조어에 익숙하지 않은 중장년층이 특히 어려움을 겪는다. 이날 중장년 유동 인구가 많은 종로3가에는 건물 1층에 영문명만 적힌 간판을 내건 가게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탑골공원 앞에서 만난 정모(79)씨는 “영어를 한 글자도 몰라 ‘A파스타 집 앞에서 보자’고 약속을 잡았는데 Pasta를 못 읽어 한참 헤맨 적이 있다”고 했다.

영어 간판은 위법 소지도 다분하다. 옥외광고물법 시행령은 간판에 영어를 사용할 때 한글을 병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건물 높이가 4층이 넘지 않고 면적이 5㎡ 이하면 허가ㆍ신고 대상이 아니다. 설령 한글을 같이 쓰지 않은 간판이 적발돼도 과태료 부과 근거가 명확하지 않아 실효성이 떨어진다.

최근엔 외국어로만 표기된 ‘무인주문기’가 세대 장벽을 높이는 주범이 되고 있다. 한글문화연대 분석에 따르면, ‘터치 스크린(touch screen)’ 등 무인단말기에 자주 보이는 영어 표현 6개를 제시했더니 60대는 절반가량이 모른다고 답했다. 연령대가 올라갈수록 모르는 단어 비율은 약 1.5배씩 상승했다.

"간판은 공공지원 기능 수행해야"

간판은 전 세대, 전 국민을 아우르는 공공지원 기능을 수행한다. 지나친 영문 표기를 지양해야 하는 이유다. 모범 사례는 있다. 서울 성균관로 일대 거리는 종로구 ‘간판 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일부 간판을 한글로 교체했다. 다른 곳이라면 으레 영문명만 있던 프랜차이즈 커피나 편의점 간판에 한글이 적혀 있다. 혜화동에 사는 허정선(85)씨는 “한글이 크게 써 있어 나처럼 영어를 못하는 노인들은 편하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간판은 개인의 상호를 알리는 동시에 표지판 역할도 한다”며 “한국어만 알고 있는 사람이 이용할 때 이질감이 없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소희 기자
이유진 기자
오세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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