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인 '쪼개기 납부'에 변호사는 '쪼개기 변론'… 삭막한 서초동 풍경

입력
2022.10.09 13:40
수임료 분할 납부에 변호사도 받은 만큼만 변론
분할납부 후 계약해지 및 반환 요구도 비일비재
착수금 지급 늦었다며 서면 제출 안한 변호사도
"변호사 급증하는데 법률 시장은 위축된 게 원인"

파산관재인 출신 A변호사는 사업에 실패한 의뢰인 B씨의 사정을 고려해 착수금 300만 원을 50만 원씩 6개월 분할 납부받기로 했다. B씨는 그러나 착수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회생신청 기각 결정이 나자 약속한 착수금을 내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속앓이하던 A변호사는 결국 수임료를 포기했다.

법률시장 침체와 변호사들의 경쟁 격화로 수임료를 둘러싼 변호사와 의뢰인 사이의 다툼이 잦아지고 있다. 9일 법조계에 따르면, 변호사에게 한번에 지급됐던 착수금이 6개월이나 4개월 단위로 분할 지급되는 게 새로운 관행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변호사 수임료는 보통 착수금과 성과보수로 나뉘는데, 소송 결과와 상관 없이 변호인 업무를 시작하며 받는 돈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는 사례가 늘어난 것이다.

극심한 수임 경쟁 여파로 의뢰인이 착수금 지불을 미루거나 되레 변호사에게 반환을 요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C변호사는 형사재판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다며 의뢰인이 미지급된 착수금을 주지 않겠다고 통보해 곤혹을 치렀다. 의뢰인은 심지어 이미 지불한 착수금까지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소속 지방변호사회의 조정으로 문제는 해결됐지만 "두고보자"는 의뢰인 발언으로 C변호사는 한동안 불안감에 시달렸다.

지난 6월 대구 변호사 사무실 방화사건을 계기로 대한변호사협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변호사들이 신변위협을 느낀 사례 중에는 위임 사무를 모두 완료했는데도 착수금 반환을 요구하며 협박한 사례도 포함돼 있었다.

변호사들은 착수금을 주지 않으려고 '꼼수'를 부리는 의뢰인이 늘어나는 이유로 과열 경쟁을 꼽는다. 대한변협에 따르면 7일 기준 등록변호사는 3만2,600명에 달한다. 2011년 1만 명대 수준이던 변호사 수가 10년 만에 2.5배 늘어난 것이다. 반면 법원에 접수된 1심 본안사건은 2012년 140만여 건에서 지난해 110만여 건으로 감소했다. 최근엔 변호사 없는 '나홀로 소송'도 증가 추세다.

의뢰인들도 할 말이 많다. 착수금 지급을 두고 의뢰인의 고민이 커진 가장 큰 이유는 '무성의한' 변호사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대한변협은 지난 8월 사건을 수임하고도 장기간 소장을 제출하지 않고 변론기일에 불출석하는 등 성실의무를 위반한 변호사에게 정직 1년의 중징계 조치를 내렸다. 부친의 형사재판을 중견 로펌에 맡긴 D씨도 "착수금이 제때 지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변호사가 재판부에 서면 자료를 제출하지 않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고 전했다.

판사들 사이에서도 변호사들이 예전과 비교해 '다소 무성의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수도권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선임계가 제출됐는데도 변호인이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아 기일을 몇 달 동안 잡지 못한 적이 있다"며 "결국 변호사가 교체되면서 재판만 더 길어지게 됐다"고 말했다.

법조계에선 변호사들이 해마다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법률 시장은 갈수록 위축되고 있는 점을 '불량 의뢰인'과 '불량 변호사'가 증가하는 이유로 꼽고 있다. 조세·산업기술 분쟁사건을 주로 맡아온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전문 분야가 아닌 일반 민형사 사건일수록 착수금을 놓고 의뢰인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며 "법률 시장이 성숙해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돈 문제를 놓고 다툼이 잦아져 씁쓸하다"고 밝혔다.

문재연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