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증명했는데 국선 선임 안해준 법원… 대법 "방어권 침해"

입력
2022.10.05 11:50
뺑소니범, 1심 재판 중 재산 압류 자료 제출
2심, 자료 불충분 이유 국선변호인 청구 기각

하급심 재판 과정에서 재산이 압류된 사실을 피고인이 증명했는데도 상급심 법원이 국선 변호임 선정을 거부한 채 판결한 것은 위법하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5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도주치상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수원지법으로 돌려보냈다.

배달업을 하던 A씨는 지난해 4월 평택시 교차로에서 신호를 무시하고 오토바이를 몰던 중 맞은편에서 오던 승용차를 들이받았다. A씨는 피해 차량 운전자에게 음식 배달을 해야 한다며 연락처를 알려줬는데, 알고 보니 가짜 전화번호였다. 피해자는 전치 2주 상해를 입었고 승용차 수리비는 85만 원 상당이 나왔다.

A씨는 도주치상 및 도로교통법 위반(사고후 미조치) 혐의로 기소됐다. A씨가 운전하던 오토바이는 의무보험도 들어있지 않아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 위반 혐의도 적용됐다.

1심은 모든 혐의를 인정해 A씨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하고 40시간의 준법운전강의 수강명령을 내렸다.

A씨는 항소심에서 국선변호인을 선정해달라고 청구했다. A씨는 1심에서도 국선변호인 도움으로 재판을 받았다. 피고인이 빈곤 등을 이유로 변호인을 선임할 수 없는 경우, 법원은 피고인 청구에 따라 변호인을 선정해야 한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A씨가 소명 자료를 충분히 제출하지 않았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A씨는 결국 국선변호사 없이 홀로 재판을 받았고, 2심은 1심 판단을 유지했다.

대법원은 원심 결정에 문제가 있다고 봤다. 1심 재판기록상 A씨는 월 200만 원의 급여를 받으며 일하고 있고, 채권 압류 및 추심명령으로 은행 계좌 출금이 제한되며 월세방 가구 등이 압류된 사실이 있었다.

대법원은 형사소송규칙상 재판 기록에 의해 피고인의 빈곤 등 사유가 소명됐다면 별도 소명자료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1심 재판에서 피고인의 빈곤이 소명됐다면, 2심 재판부는 별도 자료가 없어도 국선변호인을 선정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비슷한 취지의 지난 1월 판례를 언급하며 "원심 조치에는 피고인이 국선변호인 조력을 받아 효과적인 방어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오도록 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고 밝혔다.


문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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