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18일 대구 시민운동장 야구 경기에서 진기한 일이 벌어졌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입스(Yips)'란 현상 때문이었다.
후반기 주말리그 경북고 대 예일메디텍고의 2회 초 경기였다. 경북고 수비 당시 투수의 공을 받은 경북고 이승현(18) 포수가 투수에게 던진 공이 짧게 원 바운드됐다. 다음에 던진 공은 투수의 키를 훌쩍 넘겼다.
그때부터였다. 상대팀은 주자가 출루하기만 하면 어김없이 도루를 시도했다. 경북고 타선에서 중심이자, 수비에서는 주전포수인 이승현 선수의 리턴 송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이닝부터 이 선수의 악송구는 걷잡을 수 없었다. 투수에게 던진 공의 둘 중 하나는 2루수, 유격수에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투수가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공을 던진것이다. 하지만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2, 3루로 도루를 시도하는 상대편 주자는 완벽한 송구로 모두 잡아낸다는 것이다.
경기 중반이 되자 투수 역시 안 되겠다 싶었는지 마운드 밑으로 걸어 내려가 공을 건네받고, 이승현 선수 역시 투수 쪽으로 걸어가 공을 건네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경기 종반 무렵에는 학교 관계자와 동문들 사이에서 안타까움을 넘어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엘리트 야구 경기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투수의 투구 리듬까지 무너뜨리고 만다. 저래서는 전국 대회에서 경기를 치를 수 없다. 차라리 1학년 포수로 대체하고, 포지션 변경을 검토해야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9회에 이르러서는 "왜 포수를 교체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이준호(46) 경북고 감독을 원망하는 목소리마저 터져나왔다.
이승현 선수가 이날 비공식으로 기록한 폭투는 '39개'였다. 이 숫자는 입스의 결과물이었다. 입스란 압박감이 느껴지는 시합 등 불안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근육이 경직되면서 운동선수들이 평소에는 잘 하던 동작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입스로 인해 선수 생활을 지속하지 못하고 유니폼을 벗는 선수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이 현실이다. 단순한 슬럼프와는 다르다.
무엇이 촉망받는 유망주를 입스에 이르게 했고, 또 어떻게 이승현 선수는 입스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을까.
경북고 야구 선수들은 하나 같이 남 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다. 반면 심리적 부담감도 엄청나다. 경북고는 항상 주위로부터 우승을 요구받는다. 황금사자기, 청룡기, 대통령배, 봉황대기 등 소위 메이저 4개 대회에서 모두 우승한 경험이 있는 팀은 전국에 경북고를 포함해 충암고, 서울고, 덕수고, 휘문고, 인천고, 동산고, 광주일고, 광주동성고(옛 광주상고), 군산상고, 천안북일고, 대구상원고(옛 대구상고) 12개교에 불과하다.
전국의 고교야구 88팀 중 12개 팀이면 전체 13.6%에 해당한다. 고교야구계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기란 그 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경북고는 이들 12개 팀들 중에서도 메이저 대회 우승 21회로 전국 최다 우승 타이틀 보유 팀이다. 이 팀에서 2학년생이 주전 포수에 타선의 중심을 맡으면 엄청난 중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포수라는 포지션은 더욱 그러하다.
'좋은 투수를 보유한 팀은 시리즈에서 승리할 수 있고, 좋은 포수를 보유한 팀은 시즌을 이긴다'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좋은 포수를 보유하기란 그만큼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좋은 포수를 보유한 팀은 경기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승현 선수를 야구계로 불러드린 인물은 다름 아닌 삼성라이온즈 강민호 선수다. 이 선수는 초등학교 3학년이던 해 TV에서 본 강민호 선수의 플레이에 반해, 4학년이 되던 이듬해 야구부가 있는 구미 도산초등학교로 전학 본격적인 야구인생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포수는 중요한 포지션이지만 힘든 자리다. 타 포지션 보다 많은 체력소모와 명석한 두뇌까지 겸비해야 소화할 수 있는 자리다. 그렇다보니 야구 꿈나무들은 크게 선호하지 않는 자리기도 하다. 하지만 이승현 선수는 야구를 처음 접할 때부터 포수가 아니면 야구를 하지 않겠다고 떼를 쓸 정도로 포수라는 포지션에 집착했다.
이런 이 선수가 이날 경기 도중 감독에게 팀을 위해서 자신을 경기에서 빼달라고 , 그리고 경기 후 포지션 변경을 요청했을 정도니 당시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된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게 해준 이는 바로 경북고 이준호 감독이었다. 이날 경기에서 이 감독은 이승현 선수보다 먼저 멘탈이 유체이탈된 것으로 보인다. 이 감독은 "경기 당일 오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선수가 믿을 수 없는 플레이를 펼치는 것을 보니, 시즌을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할지 막막했다"고 털어놨다.
이 감독은 주전 포수의 입스로 인한 걱정보다 더 화가 났던 부분이 있었다고 했다. 그것은 이 선수가 자신에게 "감독님 더 이상 경기를 못하겠습니다. 경기에서 저를 빼주십시오”라고 한 것이다. 이 감독은 “그때 정말 호되게 나무랐다. 경기를 져도 좋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네가 시작한 경기, 네가 마무리해. 피하지 마, 도망가지도 마, 여기서 네가 피하고 도망가면 야구가 문제가 아니라 인생의 패배자가 된다. 경기 승패는 내가 책임 질 테니 끝까지 마무리하고 들어오라고 호통을 쳤다"고 했다.
이 감독은 이 선수를 어렵게 스카우트했다. 야구 좀 한다고 거들먹 거리거나 튀는 행동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선수였고, 동료와 팀을 먼저 생각하고 때로는 자신을 희생할 줄도 아는 모범적인 선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좋은 예가 올해 전반기 주말리그 첫 경기 대구고 전이었다. 사실상 전반기 주말리그 우승 결정전이나 다름없는 경기였고, 경기 승패 여부에 따라, 전국대회 출전권도 걸렸다. 당시 승현이는 손목 부상으로 수술 날짜가 잡혀 출전이 불가능했지만 본인이 대구고 경기 이후로 수술 날짜를 미루고 출전했다.
"2학년 초입의 선수가 팀을 위해 진통제를 먹고 경기에 나선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요즘 프로 스카우터가 눈길 한번 주거나, 언론에 기사 한번 나가면 선수 스스로 몸을 사리는 세태인데, 승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팀을 위해 함께 땀을 흘리고, 희생한 선수를 어려운 시기에 입스와 혼자 싸우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떻게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팀원들 또한 모두 그랬을 것입니다. 우리 선수들 모두가 자랑스럽습니다."
이준호 감독은 특히 김종화(32) 코치의 정성과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김 코치는 누구보다 입스가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적인지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김 코치의 짧은 프로 경력을 막 내리게 한 것도 다름 아닌 입스기 때문이다.
김 코치는 당시 경기 직후 비록 자신은 입스를 극복하지 못했지만 승현이 만큼은 완쾌시키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김 코치에 따르면 입스는 강박감, 부담감 ,무거운 책임감 등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원인이다. 그러므로 자신감을 찾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고 현 상태에서 더 이상 자신감을 잃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망과 망 사이로 볼을 던지고 멀리 강하게 공을 보내는 훈련을 시켰다. 당일 기록한 폭투 수를 노트에 기입토록 해 날이 갈수록 폭투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눈으로 확인토록 했다. 자신감이 회복되면서 입스는 극복됐다.
김 코치는 "승현이가 필요없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훈련량을 늘렸고, 송구에 자신감을 불러올 수 있는 특화된 훈련과 상담을 병행한 것이 주효했다"고 말했다.
이승현 선수는 어머니와 누나 3인 가족이다. 이 선수가 3세 되던 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이 선수는 “어릴 적 친구들이 공원에서 아버지와 캐치볼하거나, 경기 때 동료 아버지들이 오셔서 응원하는 모습을 볼 땐 부러웠다"고 말한다. 그는 "아버지는 씨름을 좋아하셨고 또 잘 하셨다고 들었는데 건장한 신체와 운동신경을 가지게 된 것은 아버지에께 물려받은 DNA 때문인 것 같다"며 "곁에 계시지는 않지만 항상 주위에서 응원하고 있음을 느낄 때가 많다"고 했다
이 선수에게 경상중 시절 은사인 차정환(42) 감독은 양아버지나 같은 존재다. 그는 지금도 차 감독을 많이 의지하고 소통하고 지낸다. 이 선수는 "아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수호천사를 내려주신 것 같다"며 "언젠가는 받은 사랑을 되돌려 주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이승현 선수는 입스를 극복하고 10월7일 울산에서 펼쳐질 전국체전 경기를 향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