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타고 들어가면 펼쳐지는 '아미빛 세상'

입력
2022.08.1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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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의 여름
라벤더가 만든 보랏빛 융단, 고혹적인 후라노
영롱한 에메랄드 물빛, 신비로운 비에이
산산히 부서지는 유리종 소리, 고즈넉한 오타루

"오겡키데스카(잘 지내나요)?" 여주인공이 첫사랑을 향해 설원에서 띄운 영화 '러브레터'(1999)는 일본 홋카이도에서 탄생했다. 이 영화로 눈에 대한 이미지가 워낙 강해져 홋카이도는 적잖은 이들에게 '겨울 도시'로 각인됐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홋카이도를 논할 때 여름을 빠뜨려선 안 된다. 1년의 반을 눈에 묻혀 산 섬은 긴 겨울잠에서 깨면 '꽃의 왕국'으로 변한다. 겨우내 사람 키만큼 쌓인 눈이 무색하게 섬 곳곳엔 알록달록한 꽃들로 오색찬란한 융단이 깔린다. 차디찬 오호츠크해에 인접한 일본 최북단의 섬, 지난 2일 삿포로에서 해는 오전 4시 29분에 뜨고 오후 6시 51분에 졌다. 14시간이 넘는 일조시간은 서울보다 해를 길게 먹고 자란 섬의 여름을 기묘하게 살찌웠다. 후라노, 비에이 그리고 오타루.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뚝 끊겼던 인천~홋카이도의 하늘길이 7월 다시 열려 섬 여름의 한복판을 열차를 타고 둘러본 풍경이다.



팬데믹 후각 상실 공포의 극복, 팜 도미타

삿포로역에서 JR열차에 몸을 싣고 1시간 20분여를 가면 '아미빛(방탄소년단 팬덤의 상징색인 보라색) 세상'이 펼쳐진다. 보랏빛 라벤더로 뒤덮인 후라노의 거대한 정원 '팜 도미타'다. 15만㎡의 꽃밭에 일렁이는 라벤더꽃 물결은 보라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 고혹적이다. 라벤더 향은 걸음을 뗄 때마다 은은하게 밀려온다. "그대 모습은 보라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지."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란 이런 게 아닐까. '아재 감성'이 문득 자랑스러워진 순간, 팬데믹으로 2년 넘게 마스크로 코를 숨기며 살며 생긴 후각 상실의 공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팬데믹을 잊게 한 라벤더는 7월 중순에서 8월 초까지가 절정이다. 태어날 때부터 밭의 기운을 타고난 덕분일까. 팜 도미타의 주인인 도미타(富田)씨는 이 농장을 1903년부터 일궈 세계에서 손꼽히는 라벤더 명소로 키웠다. 무료로 개방된 이 농장엔 팬데믹 전만 해도 연간 1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렸다. 후라노엔 라벤더를 기르는 농원이 여러 곳이다. 이시카리강의 지류인 소라치강과 후라노강이 합류하는 곳에 펼쳐진 비옥한 땅이 비결로 꼽힌다. 라벤더는 1950년대부터 후라노에서 화장품용 작물로 대량 재배됐다.



삶과 죽음의 공존, 아오이이케

후라노에서 기차로 40여 분 거리. 비에이는 후라노와 함께 훗카이도 여름 여행의 성지다. 세계적인 여행 안내서 론리플래닛에 비에이는 이렇게 묘사됐다. '프랑스 시골의 자연을 보는 느낌'. 이 표현처럼 비에이엔 탁 트인 들판과 노란 밀밭이 구릉을 따라 아득하게 펼쳐진다. 도쿄 등 일본의 다른 지역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밀레의 그림에서나 나올 법한 목가적 분위기가 이색적이다. 한적한 시골 도로에 차를 세워 놓고 피라미드 모양의 호쿠사이노오카 전망공원 등에 올라 평온함을 즐기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이국적 비에이 풍경의 하이라이트는 푸른 연못을 뜻하는 아오이이케다. 영롱하게 빛나는 에메랄드 물빛은 그저 신비롭다. 연못엔 가지만 남은 자작나무들이 고요하게 잠겨 있다. 죽은 나무들은 투명한 물빛에 반사돼 하늘에도 도열하듯 뿌리를 내린다. 자연과 빛이 일군 데칼코마니다. 이 연못은 1988년 도카치다케 분화 때 화산 폭발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건설된 제방에 물이 고여 만들어졌다. 연못의 연한 쪽빛은 인근 온천에서 솟아나는 온천수의 수산화알루미늄 성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자연과 인공이 우연히 일군 호수엔 삶(온천수)과 죽음(자작나무)이 공존했다. 피붙이가 세상을 떠나면 '기념식수'를 하고 싶은 곳이다. 푸른 연못 속 자작나무에 살짝 눈이 내린 사진은 아이폰(IOS7·2013) 배경 화면으로 쓰였다.



"오겡키데스카?" 손나팔의 충동, 오타루

신치토세공항에서 JR 쾌속열차로 1시간 20분쯤 달리면 도착하는 오타루는 동화 같은 도시다. 오타루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오르골당 본점에선 4만여 개의 오르골이 따뜻한 음악을 연주하고, 거리를 수줍게 밝히는 오렌지빛 가스등에 달린 유리종은 바람에 휘날려 수시로 도시를 깨웠다. 19세기 후반 개화기에 서양 기술을 받아들여 시작된 유리 공예의 전통은 두 세기를 건너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오타루에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도심엔 20세기 초엔 세워진 유럽풍의 우아한 벽돌 건물들이 우뚝 섰고, 시가지에서 1㎞가량 근해로 이어지는 운하 옆엔 일본식 석조 창고가 줄지어 늘어섰다. 1872년 개항해 홋카이도 무역항으로 전성기를 누린 흔적이다. 오타루 운하는 1914년 착공해서 9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운하의 역사와 함께한 석조 창고 일부는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탈바꿈해 21세기의 낭만을 빚는다. 오타루 운하를 찾은 날 공교롭게 비가 왔지만, 사람들은 이 도시의 고즈넉함을 쉬 포기하지 않았다. 운하의 시작점인 아사쿠사다리 선착장엔 자그마한 나룻배를 타려고 몰린 관광객들이 우비를 입고 줄을 서 기다렸다. 오타루 시가지와 항구를 한눈에 내려보는 전망대는 덴구산이다. 겨울엔 스키장으로 운영되고 여름엔 시민의 휴식 공간 역할을 한다. 덴구산의 눈 덮인 스키장은 '러브레터' 첫 장면의 배경이다. 눈밭에 누워 있던 여주인공은 숨을 버틸 때까지 참은 뒤 일어나 설원을 터벅터벅 걷는다. "오겡키데스카?" 손나팔을 한 채 이렇게 외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풍멍' 느림이 준 낭만, 열차여행의 모든 것

후라노와 비에이 그리고 오타루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열차 여행은 그 여유를 돋우는 좋은 땔감이다. 도심에 살면서 내 주변의 풍경을 오롯이 정면으로 마주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삿포로역에서 JR홋카이도의 '후라노 라벤더 익스프레스'를 타면 기차 창문을 마주 보고 앉아 후라노역까지 갈 수 있다. 한 시간여 동안 일본의 아기자기한 일상 풍경을 정면으로 눈에 담다 보면 뒤죽박죽된 머리를 디스크 조각모음 하는 기분이 든다. 관광버스와 자동차를 타고 값진 풍경을 옆으로 빠르게 흘려보내야 하는 것과 달리 홋카이도 열차 여행은 '풍멍'(풍경 보며 멍때리기)하기 좋다. 9일 기준 일본은 관광 목적의 입국을 단체여행만 허용하고 있지만, 그 빗장이 풀리면 열차로 느리게 홋카이도를 둘러보는 것도 도전해볼 만하다. 기차 여행을 꿈꾼다면 외국인 여행객 대상 '홋카이도 레일패스'가 제격이다. 현금 승차와 비교해 약 40%의 비용을 아낄 수 있다. 이 중 '삿포로~후라노 에리어 패스'로 신치토세공항에서 삿포로, 후라노, 비에이, 오타루 등을 자유롭게 돌아볼 수 있다. 가격은 9,500엔(성인 기준). 후라노역과 비에이역은 느리게 달리는 노롯코 관광열차(여름 한시적 운영)로도 이어진다. 뻥 뚫린 창문 넘어 기찻길 옆에서 손을 흔드는 현지 주민의 정은 여행의 깜짝 선물이다. 열차 여행이 버겁다면 팜 도미타와 아오이이케 등을 도는 관광버스를 권한다. 노선과 시간은 비에이 홋카이도 홈페이지(www.biei-hokkaido.jp)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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