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에 찍었다.’
아버지께서 카톡을 보내셨습니다. 동영상을 열어 보니 냇가에 청둥오리 부부가 헤엄치고 있는 영상이 뜹니다. 요양보호사 선생님과 함께 바람을 쐬러 나가셨다고 하십니다. 이제 87세인 아버지가 이 영상을 찍어 보낼 수 있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실감이 났습니다. 전에는 혼자서 멀리까지 나가실 수가 없었거든요.
‘와~ 예뻐요. 벌써 봄이네요.’
‘하하, 고맙다.’
누가 보면 그깟 동영상이 뭐 그리 큰일이라서 그럴까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저희에게 동영상을 보내며 소통하는 일이 흔치 않았기 때문에 놀랍게 느껴진 것입니다. 이전에 엄마의 간병인으로 사셨던 아버지께서 2014년 엄마가 돌아가신 후부터 서서히 쇠약해지기 시작하셨습니다.
교통사고로 뇌를 다친 엄마는 왼쪽으로 반신불수에 치매, 언어 장애까지 얻으셨고 19년 동안 자리보전하고 누워 계셨습니다. 증상이 심하니까 병원에서도 요양원에서도 엄마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밤과 낮이 바뀌었고, 저녁 일곱 시쯤에 잠이 들면 열한 시 경에 깨어났습니다. 으아, 으아 소리를 지르고 움직일 수 있는 오른팔과 다리로 아버지를 때리고 쳤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달래기도 하고 야단을 치기도 하면서 밤새 사투를 하셨습니다. 그런 줄을 알면서도 엄마 곁에 있을 수 없는 저희 오남매는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한층 긴장한 모습이셨습니다.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갔는데 나까지 그러면 안 되지. 니들이 힘들 것 아니냐.”
아버지의 자기관리는 엄청났습니다.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서 치매 방지에 좋다는 붓글씨를 쓰시고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어떤 때는 의정부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인천까지 다녀오시기도 했습니다. 치매에 걸리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다음 정거장을 외우는 훈련도 한다고 하셨습니다. 집이 가까운 남동생과 홀로 된 막내 여동생이 자주 들여다보긴 했지만 그렇다고 무슨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관리를 하시는 아버지도 세월을 이기실 수는 없는지 시나브로 약해지셨습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머리 뒤에 혹처럼 불거진 종양으로 누워 있기도 힘들어하셨습니다. 종양은 수술하셨지만 여전히 지내기가 힘드셨습니다. 음식 조절을 해야 하시는데 매끼 해드릴 사람이 없으니 주로 사다 드셨습니다. 고혈압과 당뇨도 있는데다가 무릎이 좋지 않아 물리치료기를 달고 사셨습니다. 평생 엄마가 해드린 음식에 길들여진 아버지는 어디서 음식을 사 오셔도 강하고 세게 조리가 된 음식을 드시기 힘들어하셨습니다. 그 상황에서 전립선암 판정까지 받게 되니 저희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에 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술을 받으시라고, 그러면 저희 중 한 명이 간병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아버지께서는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수술 안 한다. 이 나이에 언제 죽은들 놀랍겠냐. 신기하겠느냐.”
“아프셔서 어떡해요?”
“괜찮다. 괜찮아. 너희들 살기도 바쁜데 신경 쓰지 마라.”
“아휴, 정말 혼자 계시는데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면서도 생업에 아이들에 다들 지쳐 있는 터라 명절이나 생신, 어버이날 뵙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막냇동생이 요양등급을 신청해 보자고 하였습니다. 저희는 정보가 거의 없었던 터라 과연 나올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였습니다. 내심 괜찮다고만 하시는 아버지를 믿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여동생은 병원에 아버지를 모시고 가서 진찰받았고 의사선생님의 소견서도 받았습니다.
등급을 신청하고 심사를 하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괜찮다고 하셨는데 음식도 못 드시고 마려움을 느끼지 못해 매번 속옷에 소변을 지리거나 실수를 하면서도 그러셨습니다. 엄마처럼 쓰러져야 아픈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아버지는 그냥 참고 버티시려고만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희의 간절한 소원을 담아 서류를 접수하고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내내 얼마나 간절한지 기도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다행히도 4급 판정이 나왔고 하루 세 시간 요양보호사님의 돌봄을 받게 되었습니다. 온종일 썰렁하게 혼자 계시던 집안은 요양보호사님의 훈기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요양보호사님은 요리가 취미라고 하실 만큼 음식을 잘하셨고, 아버지의 상태에 맞게 조절하기 시작했습니다. 올 여름 저희가 평소에 아버지가 즐기시는 참외와 크림빵을 사서 갔을 때는 크게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한테 이런 음식 드리면 안 돼요. 큰일 나요.”
“아, 네. 아버지가 잘 드시는 것이라서요.”
“어르신은 음식 관리 잘해 드려야 해요.”
식탁을 보니 아버지가 드시는 음식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습니다. 견과류를 잘게 다져서 치아가 좋지 않아도 드실 수 있게 하였고, 짜디짠 젓갈이며 저장 음식들은 금방 조리를 하여 심심하게 간이 된 반찬이 주가 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온 다음부터 잠도 잘 자고 마음도 편해. 얼마나 고맙게 잘해 주시는지 딸 하나 더 얻은 것 같다.”
“딸이 넷인데 이제 다섯이 됐네요.”
“그래. 이쁜 딸이지.”
요양보호사 선생님도 환하게 웃으십니다.
“정말 친정아버지 같으세요. 몸이 안 좋으신 데도 얼마나 깔끔하신지 제게 부담 안 주려고 뭐든 단정하게 하신다니까요.”
아버지가 또 자랑하십니다.
“주말에는 집에 가서 유기농 재료를 가져오신다. 여름내 상추며 고추, 쑥갓 실컷 먹었어. 내가 선생님 온 다음부터는 맹물을 먹은 적이 없어. 영지 버섯이며 약재를 넣어서 달여 주거든.”
아버지의 병이 단번에 나을 수는 없지만, 선생님이 정성스럽게 보살펴 주시는 것만으로도 안도가 되나 봅니다. 두 분의 친밀함이 얼마나 강하게 느껴지는지 딸의 자리를 뺏긴 것 같은 서운함도 살짝 듭니다. 선생님 오기 전에 자주 와 보지 못했으면서도요. 그러고 보면 진정한 자식은 멀리서 안부를 묻는 게 아니라 곁에서 돌보는 사람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오신 후부터 아버지의 말씀이 달라졌습니다. 말끝마다 “감사”와 “고맙다”가 입에 배셨거든요.
“이렇게 왔다 가주니 감사하다.”, “사과를 이렇게 많이 사 왔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그러잖아도 심심했는데 물고기(구피)를 가져왔구나.”
낚시를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구피가 노닐고 있는 어항을 보시면서 대리 만족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감사는 저희와 손주들에게도 이어집니다.
“아이고, 많이 컸구나.”, “군대도 갔다 왔어? 감사하네.”, “취직 준비 중이라고? 내가 기도하마.”
아버지의 따뜻한 말씀과 기도는 기가 죽고 힘이 빠져 있는 자손들을 살리는 생명수입니다.
아버지의 감사는 요양보호사 선생님을 통해 더욱 강화된 것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집에 오자마자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기도부터 하신답니다.
“오늘도 어르신을 깨워 주시고 하루를 시작하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좋은 음식 드시고 건강하게 하루를 보내게 하여 주세요. 아멘”
매일의 기도가 쌓이면서 집안에는 온기가 돌고, 두 분의 웃음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날 드실 저녁과 다음 날 아침까지 준비해 놓으시고 집을 나선다는 선생님,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절대로 그렇게 하실 수 없지요.
오늘 아침 아버지와 통화를 했습니다.
“아버지. 식사하셨어요?”
“그럼. 선생님이 오셔서 잘 먹었다.”
“정말 감사하지요. 너무나 고마워요.”
감사는 전염성이 있나 봅니다. 저도 모르게 감사하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요.
“아버지, 올 김장도 제가 해드릴게요.”
“아니다. 이제는 안 해 와도 된다. 전에 니가 가져 온 고춧가루로 집에서 할 거야. 요양보호사님이 김장해 준다고 하신다. 배추김치도 하고, 알타리김치도 하고 … 에… 기억이 안 나네. 선생님 또 무슨 김치한다고 그랬죠?”
아버지 곁에 있던 선생님이 나머지를 불러주십니다.
“돌산 갓김치, 파김치, 백김치에 동치미요!”
“와~ 정말 대단하시네요. 어떻게 그렇게 하신대요?”
“그러니 감사하지. 고맙다. 등급 받게 해줘서. 나 혼자서는 뭘 하질 못하겠거든.”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오신 후 우리 집은 그야말로 ‘홈 스위트 홈’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노년을 아름다운 말과 좋은 음식으로 곱게 수놓아 주신 선생님. 당신은 진정한 생활의 예술가입니다.
고맙습니다. 저희에게 와 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