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수준 정도 됩니다."
2017년 이만수 전 감독을 도와 라오스국가대표야구팀을 지도했던 권영진 감독의 말이었다. 당시 팀이 창단된 지 4년여가 흐른 즈음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5년의 시간이 흐른 현재는 "고등학교 1학년 수준"이라고 평가를 듣는다.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그럼에도 라오스 야구팀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늘 희망적이다.
얼마 전 피칭머신을 도입한 것도 그렇다. 라오스 최초다. 라오스국가대표 남자팀과 여자팀을 각각 맡고 있는 민상기(51)감독과 조민규(34)감독이 하루 400~500개씩 던지던 '강속구'를 이제 기계가 대신하게 됐다.
처음 만난 피칭머신 앞에서 라오스 선수들은 초라해졌다. 130~140의 속도로 달려드는 공 앞에서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심지어 120도 안 되는 공 앞에서도 당황하는 기색이 뚜렷했다. 조 감독은 "피칭머신의 역할이 클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기계 덕분에 선수들이 130을 넘는 구속을 경험할 수 있게 됐어요. 그만큼 더 강해질 여지가 많아졌죠. 이제 대학생 수준까지 치고 올라왔다는 평가를 받을 날도 멀잖았습니다!"
라오스 야구팀은 여러 부분에서 상황이 열악하다. 우선 기후 특성상 런닝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짧고 웨이트장도 없다. 센터의 훈련 공간도 좁다. 고등학교 교실 두 개를 합친 것보다 작다. 야구장이 있기는 하지만 면이 하나밖에 없다. 게다가 거리가 멀어서 평일에는 라오J브러더스 연습장에서 훈련을 한다. 실내 연습장 규모다. 공간이 넓지 않아서 먼 공을 던질 수가 없다. 짧은 거리는 잘 던지는데 멀리 던지기에는 약하다. 어깨 강화를 자극할 계기가 적은 까닭이다. 주말에 야구장으로 나가지만 인원이 많아(40명) 충분한 훈련을 소화하는데 한계가 있다. 방학 때에나 매일 야구장을 찾는다. 방과 후 교내 혹은 가까운 야구장으로 가서 훈련하는 한국의 중고 팀과는 비교하기 힘들다.
민 감독은 "선수들의 성실성과 훈련에 임하는 자세, 야구에 대한 애정을 놓고 봤을 때 훈련 여건만 개선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뛰어난 선수를 배출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면서 "평균적으로는 고등학생 수준이라고는 해도 그중에는 눈에 띄는 선수들이 있는데, 의지만 있다면 한국 야구계가 그런 선수들에게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 감독의 생각은 꽤 구체적이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훈련하도록 하는 연수 프로그램을 만들어 제대로 된 환경에서 훈련을 할 수 있도록 해주면 한국프로야구 2군, 혹은 그 이상에서도 충분히 뛸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야구를 통해 변화한 친구들입니다. 글러브만 쥐면 눈빛부터 달라집니다. 40도에 육박하는 온도에서 훈련한다는 걸 생각한다면 매일 지옥훈련을 하는 셈입니다. 한국 지도자들이 충분히 좋아할 만한 자질을 갖추었습니다."
민 감독은 두산베어스 김재호 선수를 키워냈다. 자질을 알아보는 눈은 충분히 신뢰할 만하다. 그는 "라오스 선수들의 성실성과 자질을 놓고 봤을 때, 당구 여제 피아비가 라오스 야구에서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자신했다.
민 감독에 첫손에 꼽은 선수는 콜라(21)였다. 포크레인 기술을 배우는 노동자이자 라오스 야구계에서 가장 촉망받는 선수다. 2018년에 열린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인상적인 투구를 펼치기도 했다. 민 감독은 "한국에 가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투수를 맡고 있는 투유(21)는 신체 조건이 좋고 야구에 대한 이해력이 뛰어나다. 일과 운동을 병행하다 보니 간혹 훈련에 빠진다. 체계적으로 훈련을 하면 반드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낼 선수라고 전했다.
"라오스 인들이 머리가 좋아요. 눈치가 빠르구요. 단어 몇 개를 툭 던지는데 그걸 이해를 해요. 문맥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한국에서 훈련을 받으면 지도자들 말을 쏙쏙 이해할 거예요. 무엇보다 의지가 강렬합니다. 라오스 선수들에게 야구는 야구 이상의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라오스는 동남아 최빈국으로 통한다. 먹고살기 바쁜 라오스인이 왜 야구를 하는지 묻는 이들이 많다. 민 감독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야구라는 종목의 존재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스포츠는 이를 향유하는 이들과 동질감을 형성합니다. 라오스의 존재감은 우리나라의 60년대만큼이나 미약합니다. 그러나 야구라는 공통분모를 갖추면 아시아를 넘어 미국 같은 선진국 사람들과도 교류가 가능할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동아줄 같은 사회적 인맥입니다. 꼭 야구 선수나 감독이 아니더라도 라오스인들이 외국으로 나가 일을 하거나 사업을 할 때 야구라는 사회적 아우라는 분명히 요긴하게 작용할 것입니다. 요컨대, 이들에게 야구는 넓은 세계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가장 훌륭한 통로입니다. 게다가 당구계의 '피아비'처럼 두각을 드러낸다면 국가 간의 우호와 신뢰 형성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신남방 진출을 놓고 중국 일본 등과 다투는 한국으로서도 야구를 통한 관계 형성은 분명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입니다."
야구는 아직 동남아시아에서 비인기 종목이다. 그래서 오히려 희망적이다. 축구와 달리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 라오스야구국가대표팀이 늘 태국을 라이벌로 상정한 것도 가능성에 기댄 측면이 크다. 태국은 라오스인들에게 경제, 문화, 스포츠 모든 분야에서 가장 지기 싫은 나라다. 현실에서 태국은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축구만 놓고 이야기해도 라오스인들은 "둥근 것만 봐도 흥분한다"고 할 정도로 축구를 사랑하지만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늘 태국에 형편없이 무너진다. 동남아에서 태국 축구의 실력과 위상이 워낙 높은 까닭이다. 그에 비해 야구는 태국에서도 비인기 종목인 만큼 선수층이 두텁지 않다. 아직은 라오스와 비교해 강팀이지만 한국 지도자들과 스포츠 시스템으로 꾸준히 지원하고 도우면 충분히 기세를 뒤집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 덕분에 '감히' 태국을 꺾는 꿈을 꾸는 것이다.
라오스인들에게 태국전 승리는 한일전 승리 이상이다. 라오스와 비교해 태국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거대한 강국이다. 제상욱(48) 라오J브라더스 대표에 따르면 라오스가 어느 분야에서든 한번이라도 태국을 꺾게 된다면 라오스 국민 자체가 각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야구 종목에서는 이것이 가능하다. 태국 이야기가 나오자 민 감독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리기까지 했다.
"KBO 데뷔는 차치하고서라도, 한국 연수를 다녀온 라오스 4번 타자가 태국과의 야구 대결에서 홈런을 때린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것은 라오스인들에게 10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한 방이 될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따지자면 홈런 하나에 라오스인들의 생산성이 10% 올라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라오스에서의 한국의 위상은 또 얼마나 올라갈까요? 라오스인들은 승리와 칭찬,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에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민 감독에 따르면 라오스인들에게 '중국인은 돈 자랑 하는 사람, 한국인은 우리를 돕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다. 2013년 라오J브라더스를 열었던 즈음, 하루 세 끼를 먹는 것을 장래 희망으로 적어냈던 친구들이 이제는 의사, 기술자, 사업가를 꿈꾸는 '보통의 청소년'으로 성장했다. 민 감독은 "이보다 더 선진국다운 도움이 어디겠습니까"하고 말했다.
최근 라오스야구는 기본 실력 향상과 함께 다양한 경험을 쌓는데 주력하고 있다. 훈련과 실전은 다르다. 실전에서 쌓인 경험이 가장 요긴한 자산이 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코로나19 팬데믹에도 새로운 대회가 창설되었다. 2021년 주라오스 대사관 주관으로 '제1회 주라오스 한국대사배 야구대회'가 열렸다. 1월9일부터 2월25일까지 주말을 이용해 리그전을 펼쳤다. 올해는 6개 팀 140여명이 참가하는 2회 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민 감독은 "선수들에게 선수로서의 자부심과 경험을 쌓는데 리그대회 만한 것이 없다"면서 "라오스와 한국 사이의 우호를 깊게 한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대회"라고 설명했다. 다만 1회 대회에 비교해 후원이 여의치 않아 대회 운영비를 후원할 기업을 물색하고 있다.
'DGB 인도차이나 야구대회'(가칭) 개최도 확정됐다. 라오스를 비롯해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말레이사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모여 리그전을 펼치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이를테면 '야구판 스즈키컵'이 될 전망이다. 알려진 대로 동남아인들이 가장 열광하는 대회는 월드컵도, 올림픽도, 아시안게임도 아니다. 그런 대회는 큰 나라에 밀려 자국 선수들의 예선에서 탈락해 버리는 까닭에 흥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언론도 관심이 없다. 말 그대로 '남의 잔치'다. 이런 동남아의 특성상 자국 선수들이 플레이를 펼치는 야구 대회를 개최하면 야구가 비록 비인기 종목이라고는 해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동남아시아인이 많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태국과 베트남, 태국과 라오스 등 라이벌 국가 간의 대결은 단번에 해당 국가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 분명하다. 'DGB 인도차이나 야구대회'에 초미의 관심과 기대가 쏟아질 수밖에 없다.
민 감독은 "라오스는 베트남 말레이시아 축구 대표 팀처럼 한국인이 감독을 맡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한국이 씨앗을 뿌리고 한국의 야구 정신과 기술을 아낌없이 전파하고 있는 만큼 'DGB 인도차이나 야구대회'는 한국에서도 관심과 호응이 클 것"이라면서 "야구판 '스즈키컵'의 흥행은 120% 보장되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야구계는 물론이고, 이만수 전 감독의 프로필과 영향력을 놓고 봤을 땐, 메이저리그에서도 중요한 진전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