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해양 실크로드 요충지’로 불렸던 스리랑카가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20년간 권력을 독점한 독재 정권은 쫓아냈지만, ‘먹고사는 문제’는 좀처럼 해법을 찾기 어려워 미래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스리랑카의 위기가 부채가 많은 개발도상국으로 번질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도 나온다.
11일(현지시간) AP통신에 따르면, 9일 고타바야 라자팍사 스리랑카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난다는 뜻을 밝힌 이후에도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는 좀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수천 명의 스리랑카 시민들은 이날도 대통령 관저 점거 농성을 이어갔다.
지속되는 시위는 현 정권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때문이다. 그가 13일부로 퇴임한다는 뜻을 밝히긴 했지만, 국민 앞에서 본인이 직접 공표하진 않았다. 마힌다 야파 아베이와르데나 국회의장의 입을 통해 알려졌을 뿐이다. 언제든 대통령이 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의구심을 품은 시민들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정권 이양이 본궤도에 이르기까지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일단 야권 수장이 전날 밤 수도 콜롬보에서 새 정부 구성방안 논의에 착수하는 등 정치권은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다. 스리랑카 제1 야당인 국민전선연합(SJB) 란지스 마두마 반다라 사무총장은 “라자팍사 연립정권에서 이탈한 정당 의원들과도 별도로 논의했으며, 추가로 만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날 이견 탓에 구체적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현지에서는 야권의 합심 분위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불투명하다는 관측도 이어진다. 우선은 ‘라자팍사 퇴출’이란 목표를 위해 움직이고 있지만, 향후 권력 나눠먹기 과정에서 다시 사분오열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탓이다.
고질적인 경제난이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더 큰 문제다. 스리랑카는 경제 기초체력이 무너진 상태에서 54.6%의 물가상승률과 저성장, 6%에 근접한 높은 실업률이라는 복합 위기가 몰아친 상태다. 총 외채는 510억 달러(약 66조2,000억 원)에 이른다. 이미 지난 5월 공식 채무불이행(디폴트) 선언으로 국가부도에 빠졌다.
정권이 바뀐다 해도 붕괴 직전의 경제난을 타개할 뾰족한 방법은 없다. 오히려 두 달째 스리랑카 당국이 국제통화기금(IMF)과 진행해 오던 구제금융 협상은 한동안 차질이 불가피하다. 새 정부가 출범하고 내각이 구성돼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협상이 미뤄질 수밖에 없는 탓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정치적 불안정은 구제금융 협상 과정을 더욱 복잡하고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까스로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 해도 합의를 이룰 수 있을지 미지수다. IMF는 스리랑카에 구제금융 대가로 △세금 인상 △기준금리 인상 △전기료 등 공공보조금 삭감 △외국인 투자자에게 자본시장 개방 등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현지 최대 영자지 선데이타임스는 “정부가 (IMF가 요구하는) 세제 개혁과 개혁 착수 같은 조건을 충족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취약한 스리랑카 경제체질 탓에 이 같은 조건을 견디기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한 급전 마련도 쉽지 않다. NYT는 생필품 부족과 물가 폭등으로 분노한 국민들을 달래려면 연말까지 60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텅 빈 곳간이 새 정부가 들어섰다고 돌연 두둑해질 리 없다. 그나마 ‘돈줄’이 됐던 인도와 중국에 기대기도 어렵다. 스리랑카는 이미 중국에 80억 달러, 인도에 40억 달러 채무를 진 상태다. 인도 매체 타임스오브인디아는 “스리랑카에 신뢰할 수 있는 정권이 들어서지 않으면 도울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스리랑카 위기가 ‘신흥국 줄도산’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스리랑카의 정치·경제 위기는 부채가 많고 식량부족과 인플레이션으로 더욱 취약해지는 다른 국가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이미 국제사회에 차관 제공 등의 도움을 요청한 잠비아와 레바논, 물가상승률이 24%에 달한 라오스 등을 ‘제2의 스리랑카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국가로 지목했다.
이날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 역시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신흥국의 3분의 1, 저소득국 3분의 2가 빚더미에 앉은 상태”라며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등에 막대한 돈을 빌려준 중국과 주요 20개국(G20)이 부채 탕감 속도를 높이지 않으면 세계가 침체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