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즈버그 연설 당시 링컨이 뉴욕 시민들의 ‘징병법 반대’ 반정부 시위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는 사실을 기사로 언급한 적이 있다. 구체적 사연은 이러했다.
남북전쟁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링컨은 병력을 충원해야 했다. 그는 1863년 3월, 징병 대상을 25~35세 남성에서 45세까지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새 징병법을 선포했다. 문제는 300달러만 내면 징병을 면제해주고, 대체자를 고용해서 대신 징병에 응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었다. 흑인은 시민이 아니어서 징병 대상이 아니었다. 7월 11일 뉴욕의 첫 징병 대상자 명단이 발표됐고, 부자들은 돈으로 면제를 받았다.
가난한 백인, 특히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격분했다. 한 해 전인 1862년 9월 노예해방 선언으로 전국 각지의 흑인들이 뉴욕으로 몰려 들어 그들과 일자리 경쟁을 벌이던 때였다. 7월 13일 뉴욕의 일부 백인 노동자들이 징병사무소와 우체국 등 정부기관에 방화와 투석을 시작했다. 그들은 '백인 노동자들의 목숨으로 벌이는 검둥이들을 위한 전쟁’에 반대했고, “흑인 노예의 몸값은 1,000달러인데, 백인 노동자 목숨값은 300달러냐”고 따졌다. 남부연합 대통령이던 ‘제퍼슨 데이비스’를 연호하기도 했다.
노예제 폐지에 반발하던 보수언론도 전쟁 반대, 조기 종식을 지지하던 일부 진보 언론도 선동에 동조했다. 흑인 공동주택과 호화주택에 대한 약탈과 방화, 살인까지 이어졌고, 폭동 가담자는 약 5만 명으로 불어났다. 노동조합이 앞장섰고, 마피아들까지 가세했다. 경찰과 뉴욕 민병대로는 진압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링컨이 처한 처지가 그러했다. 이듬해 재선 선거도 치러야 했다.
폭동은 100여 명이 숨지고 3,000여 명이 다친 뒤인 7월 16일 연방군에 의해 진압됐다. 진압부대 주력은 게티즈버그 전투에 참전했던 ‘74 뉴욕연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