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수탁자가 토지를 맡긴 신탁자 몰래 부동산을 팔았다면 횡령은 아닐지라도 민사상 불법행위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28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최근 A씨가 명의수탁자 B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패소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A씨는 2011년 토지를 매입하면서, 등기상 소유주는 B씨로 설정하는 이른바 '3자간 등기명의신탁' 계약을 체결했다. B씨는 2014년 14억 원을 받고 A씨 허락도 없이 토지를 팔아버렸다.
A씨는 그러자 B씨를 상대로 4억2,000만 원 지급을 요구하는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B씨가 토지 매매 대금 14억 원에서 근저당 채무 9억8,000만 원을 뺀 나머지 금액을 줘야 한다는 취지였다. A씨는 "B씨가 내 동의를 받지 않고 토지를 팔면 안 된다"며 "설령 팔더라도 매매대금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A씨는 B씨가 땅을 팔아버려 매도인에 대한 소유권 이전 등기 청구권을 잃어버린 점도 지적했다.
1심은 B씨가 허락을 받지 않고 토지를 판매한 게 불법은 아니라고 봤다. "3자간 등기명의신탁의 수탁자가 부동산을 마음대로 처분하더라도 횡령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근거였다.
재판부는 다만 "B씨가 부당 이득금 2억6,000여만 원을 반환하라"고 주문했다. 재판부는 "B씨가 명의신탁받은 토지를 매도해 법률상 원인 없이 매매대금에 해당하는 이익을 얻었다"며 "A씨는 매도인에 대한 소유권 이전 등기 청구권이 상실되는 손해를 입었다"고 판단했다. 2심은 그러나 "B씨가 토지 판매로 4억2,000만 원을 받았다는 증거가 없다"며 부당 이득금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A씨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B씨가 A씨의 소유권 이전 등기 청구권을 침해한다는 사정을 알면서도, 명의신탁받은 부동산을 마음대로 처분하는 건 사회·경제 질서를 위반하는 것"이라며 "제3자의 채권 침해에 따른 불법행위 책임이 성립한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하급심이 원고 패소 판결 근거로 삼은 전원합의체 판결에 대해서도 "명의신탁관계에서 명의신탁자의 소유권 이전 등기 청구권을 보호할 수 없다는 취지는 아니다"라며 "명의수탁자의 임의처분으로 명의신탁자의 채권이 침해된 이상 횡령죄 성립 여부와 관계없이 민사상 불법행위책임을 부담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