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26일(현지시간) 지급 시한이 도래한 외화 국채의 이자액을 갚지 못하면서 볼셰비키혁명 이후 100여 년 만에 '채무 불이행(디폴트)' 상태에 빠졌다.
다만 이번 사태는 러시아가 충분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서방의 금융제재로 돈을 갚을 통로가 막혀 생긴 것으로, 돈이 없어 발생한 기존의 디폴트와는 다소 성격이 다르다. 국제 채권자들도 소송 등 행동에 나서기보다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을 일단 지켜보겠다는 입장이어서 당장 글로벌 금융 시장에 미치는 파장도 크지 않을 전망이다.
이날 미국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러시아는 전날까지 달러와 유로로 지급되는 외화 표시 국채에 대한 이자액 1억 달러를 지급하지 못했다. 당초 지급 시한은 지난달 27일이었지만 30일간의 지급유예 기간이 설정돼 이날 공식적으로 디폴트가 성립됐다.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급진 세력인 볼셰비키가 차르(황제) 체제에서 발생한 부채를 인정할 수 없다며 1918년에 외채 상환을 거부한 이후 104년 만이다.
러시아는 이날 디폴트 지정이 전적으로 서방의 탓이라고 비난했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러시아는 외국통화 채무를 상환할 의지와 수단이 있다”며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한다면 디폴트가 아니라는 걸 알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이번 사태는 러시아가 올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이 러시아 은행들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결제망에서 배제하면서 빚어졌다. 러시아는 국제예탁결제회사인 유로클리어에 이미 이자 대금을 달러와 유로화로 송금했지만, 서방의 금융제재로 개별 투자자에게 입금이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미 외신들은 이번 디폴트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가 쌓아 놓은 국제적 위상의 붕괴를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에 그친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러시아는 이미 국제금융 결제시스템인 스위프트에서 배제돼 디폴트가 글로벌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설명이다.
일본 컨설팅기업인 노무라연구소의 기우치 다카히데 이코노미스트는 블룸버그에 “채권자 대부분이 (러시아의 디폴트 상황을) 두고 보자는 방식을 취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도 "러시아 채권 보유자의 25%가 ‘즉시 상환’을 요구하면 러시아 정부와 채무 이행 소송을 벌일 수 있다"면서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채권자들이 소송에 돌입하기도 쉽지 않다"고 전했다.
개전 당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전망됐던 러시아 경제 역시 최근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서방 제제에 동참하지 않은 중국과 인도가 러시아 원유를 대량으로 수입하면서 러시아 정부의 든든한 자금줄 역할을 해주고 있어서다. 러시아 중앙은행에 따르면, 올해 1~5월 러시아 경상수지 흑자는 1,100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5배 이상 많다.
러시아 국영 천연가스기업 가스프롬의 알렉세이 밀러 회장은 최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회의에서 "유럽이 러시아 천연가스 수입을 크게 줄였지만 가격이 올라 오히려 수익이 늘었다"며 "우리는 유럽에 아무런 불만이 없다"고 말했다.
전쟁 초기 경제 파탄 우려로 바닥 없는 추락을 이어가던 루불화 가치도 최근 급등했다. 미국 CNBC방송에 따르면, 지난 23일 러시아 루블화 가치는 달러 대비 52.3루불을 찍으며 7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 경제가 외형적으로 '디폴트'에 빠졌지만, 루불화는 전쟁 전보다 경쟁력을 더 확보했다는 얘기다.
국제금융협회(IIF)의 엘리나 리바코바는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올려 "러시아의 자금줄을 몇 주만 끊어도 전쟁이 끝날 것이란 생각은 순진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