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형님이 돌아왔다. 10년만의 귀향이었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는 바람에 부랴부랴 한국행 비행기를 탔지만 장례식 마지막 날에야 한국에 도착했다. 형님은 아버지의 영전에 묵념한 뒤 그 자리에 선 채로 한참이나 영정사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형님, 계속 미국에 계실 겁니까."
조문객들의 발길이 뜸해졌을 즈음 형님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버지가 유언을 남겼다면 바로 저 말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늘 형님이 한국으로 돌아오길 바랐다.
"처자식 버릴까?"
그렇게 툭, 던지고는 하소연하듯 "나도 나오고야 싶지. 그런데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형님 사이의 평행선은 당신이 돌아가신 후에도 견고하게 유지되었다.
형님은 아버지의 꿈이었다. 형님 또한 맏이로서 아버지의 뜻을 묵묵히 받들었다. 아버지는 형님이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갈 때 대구로 보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올라가 동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유학을 위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어린 나이에 부모 형제 하나 없는 도회로 나가는 것도 그렇거니와 건사해야 할 자식이 여덟인 상황에서 아버지가 돈을 넉넉하게 보내주었을 리도 만무했다. 형님은 생활비를 충당하려고 중학교 때부터 자기보다 어린 학생들을 가르쳤다. 방학 때 한번씩 고향에 내려오면 삼촌이나 아재뻘이나 되는 것처럼 듬직하고 어른스러워 보였다.
아버지의 훈육이 형님을 올되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당신의 정신과 신념을 자녀들에게 가르쳤는데, 당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자식들에게 경전에 적힌 말씀만큼이나 진실되고 무겁게 다가왔다. 아버지의 삶이 평소의 말씀과 다르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아버지는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구세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그때가 1930년대였으니 스무 살 남짓 되던 무렵의 일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전라북도 정읍에서 구세군 목회자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아버지의 가르침은 대개 구세군 정신에 기반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늘 세 가지를 강조했다. 성실과 겸손, 그리고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었다.
제방 사업이나 경지 정리 등의 공공사업이 펼쳐질 때면 아버지가 나서서 개발위원장을 맡았다.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귀찮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지만, 아버지는 공동체를 위한 일이라면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구세군 대장 스타일이었다.
아버지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늘 관심이 많았다. 소위 말하는 ‘나라 걱정’이 유난했다. 그건 아마도 일본에서의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세군 목회자로 활동하다가 결혼한 후 일본으로 건너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며 형님과 누님을 얻어 한국으로 나왔다. 해방 직전이었다. 아버지는 그 시절에 대해서만큼은 부정적인 말들을 쏟아놓았다. 식민지 조선이 너무 궁핍해 먹고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막상 그곳의 상황은 더 힘들었던 것이었다. 나쁜 일을 많이 겪으셨던 것 같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착취당했다" "상종 못 할 인종들이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많다" 하는 말을 종종 했다. 간혹 가슴이 뜨거워지실 때는 "나라가 잘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제 몫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형님은 아버지의 첫 열매답게 아버지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흡수했다.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충실하게 꽃피워줄 아들 이상의 존재였다. 아버지는 형님이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만큼 정치나 학계로 나가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를 일으키는 주역 중의 한 명으로 우뚝 서기를 바라셨다.
정연하게 흘러가던 아버지와 형님의 관계에 변곡점이 찾아온 계기는 결혼이었다. 결혼 이후 형님은 아버지와 결별하다시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결혼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분이 바로 아버지였다. 의성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가 살고있는 아가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형님에게 연락을 넣어 만나게 했다. 아가씨는 미국에서 이민 1세대들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가발 등 미용용품을 파는 가게를 운영했다. 자식이 태어난 뒤 형님은 미국에 발이 묶였다.
1978년, 아버지는 형님의 초청으로 미국에 다녀오셨다.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몹시 낙담한 얼굴이었다. 그날 저녁에 나를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네가 장남 노릇을 해야 한다."
아버지의 얼굴에 그토록 짙은 실망을 본 적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나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아버지는 실망이었지만, 나에게는 형님의 부재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만큼이나 든든한 언덕이 사라졌으니까. 장남이라는 호칭의 무게가 가슴을 짓눌렀다.
"불쌍한 녀석……."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아버지가 문득 아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말이었다. 형님을 생각하며 뱉은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의 실망은 알고도 남음이 있었지만,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헤아릴 수 없었다. 그 마음을 이해하기엔 아직은 젊은 나이였다.
2007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조카를 데리고 형님이 다시 고향에 왔다. 조카는 "안늉하세요" 하는 어눌한 인사말 외에는 한국말을 전혀 못 했다. 머리만 검었지 미국 사람이었다. 미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때 형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식들도 장성했고 하니 이제 한국으로 돌아와서 활동을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형님은 내 어깨를 힘없이 짚으면서 말했다.
"지금 이 나이에 한국으로 와본들 아무 기반도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니."
아버지의 장례식 때에는 무척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면, 이제는 허탈한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불쌍한 녀석"이라고 했을 때의 그 목소리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아버지는 형님의 늘그막에 드리워질 회한을 이미 예견하셨던 것이리라. 동시에 형님 스스로도 아버지가 권했던 꿈을 마음 깊은 곳에서 갈구했던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때는 소용없는 후회였다. 형님은 젊은 시절부터 형수와 함께 꾸려온 상점을 별 탈 없이 경영해나가는 일상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한평생 살면 으레 "성공했다" 혹은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평가지에 올려지는 것 자체가 보람된 인생인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실패도 못 해본 삶을 살다 가니까.
형님은 지난해 미국에서 영영 우리 곁을 떠났다. 코로나19에 감염돼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하늘길이 꽉 막혀서 마지막 가는 길도 배웅하지 못해 서운한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타국에서 낯선 생을 배회하다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한 형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켠이 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