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피크제 혼란에 장관까지 나선 고용부 "위법 사업장 많지 않다" 진화

입력
2022.06.03 16:57

대법원이 연령만을 이유로 임금을 깎는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 적용이 위법하다는 판결을 내린 뒤 혼란이 계속되자,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임금피크제를 운영 중인 현장을 찾아 진화에 나섰다. 그는 이 자리에서 대다수의 임금피크제는 정년연장형이라 판결 대상과 본질부터 다르고,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더라도 제도의 취지에 맞거나 노동자 불이익 보전 조치 등을 시행한다면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정식 장관,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 크라운제과 방문

이 장관은 3일 정년을 57세에서 62세로 연장하는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를 운영 중인 크라운제과 본사를 방문했다. 노동자가 일정한 나이가 되면 고용 보장이나 정년 연장을 조건으로 임금을 깎는 임금피크제는 정년유지형정년연장형으로 나뉜다. 2013년 정년을 60세로 의무화하는 고령자고용법 개정 이후 도입됐다면 정년 변경이 없더라도 정년연장형에 속한다.

이번 현장방문은 최근 대법원이 내린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 위법 판결 때문이다. 대법원은 퇴직자 A씨가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을 상대로 낸 임금 등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A씨의 손을 들어줬다. 임금피크제가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만을 이유로 노동자의 임금을 깎는 용도로 사용됐다고 봐서다. 이후 산업 현장에서는 모든 임금피크제가 무효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졌다.

진화에 나선 이 장관은 대다수 기업이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를 운영하고 있어, 판결 대상과 본질부터 다르다고 강조했다. 고용부에 따르면 현재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사업체 7만6,507개 중 87.3%(6만6,790개)는 고령자고용법 개정을 배경으로 도입돼 정년연장형이다. 그는 "(이번 판결은) 정년 연장과 무관하게 경영 효율을 목적으로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하고 불이익 보전 조치나 업무 내용상 변화도 없는 형태의 임금피크제를 연령차별로 본 것"이라며 "대부분의 임금피크제는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라, 판례의 임금피크제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했다.

정년유지형=위법? "아닙니다"

이날 고용부는 임금피크제의 연령차별 여부에 관한 설명을 담은 자료도 배포했다. 현장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대법원 판결 8일 만에 장관의 발언과 더불어 그간의 판례를 기반으로 나름의 위법 여부 판단 가이드라인을 내놓은 것이다.

고용부는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가 모두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대법원이 이번 판결에서 내건 △임금피크제 도입 목적의 타당성 △대상 근로자가 입는 불이익의 정도 △대상 조치의 도입 여부 및 적정성 △감액된 재원이 임금피크제 도입의 본래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는지 등 4가지 판단 기준을 놓고 따져볼 문제라는 것이다. 고용부는 "고령자 고용안정이나 청년 일자리 창출 등 목적이 타당하고, 불이익을 보전하는 조치가 이뤄지는 등의 형태로 임금피크제를 시행한다면 연령차별로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는 노사 합의를 통해 도입했다면 원칙적으로는 연령차별이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 연령차별에 해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용부는 "판례에 따르면 명목만 임금피크제일 뿐 실질적으로는 비용 절감, 직원 퇴출 등의 목적으로 특정 연령의 근로자의 임금을 과도하게 감액할 경우 예외적으로 연령차별에 해당할 수 있다"고 했다.

"행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 "소송전 부추겨"

고용부의 이 같은 후속 조치에 대해 전문가들의 평가는 엇갈렸다. 법무법인 태평양 이욱래 변호사는 "무효·유효 판결은 법원에서 하는 것이고, 고용부가 개별 사업장을 들여다보며 위법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면서 "일선 현장에서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정부가 할 역할이며, 적절했다고 본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고용부가 지엽적으로 판례를 분석해 배포하는 것이 되레 소송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대법원의 판결 취지를 고려해 노사가 자율적으로 임금피크제를 정상화하게끔 이끄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면서 "자의적으로 행정부가 대법원의 판례를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며, 자칫 소송전을 더욱 불거지게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오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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