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 염창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거주하던 정지영(34)씨는 전세 만료를 앞둔 지난해 3월, 보증금 대출을 진행한 은행으로부터 "집주인 A씨와 계약한 다른 임차인들의 대출 회수가 안 되고 있다"는 전화 연락을 받았다. 정씨는 놀란 마음에 즉각 A씨에게 연락했지만 A씨는 "보증금을 돌려줄 수 있는 돈이 없다"는 '배짱' 답변만 되풀이했다.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날릴 위기에 처했던 정씨는 다행히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을 통해 보증금 2억6,500만 원을 모두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수십 명의 피해자 중 보증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임차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집주인에 대한 형사 처벌이 제대로 이뤄질지도 의문이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2일 전세 사기 피해자를 직접 만나 "①약자를 먹잇감 삼는 '악성 임대인'에 대한 징벌적 제재 규정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②주요 피해자인 2030 세대를 위해 보증료 부담을 낮춰 전세보증 가입률을 높이겠다"고 했다.
원 장관은 이날 HUG 서울북부관리센터를 찾아 전세보증 사고 추세와 대위변제 규모 등 피해 현황과 예방 대책 등을 논의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HUG 및 한국주택금융공사(HF) 관계자와 전가영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 변호사, 지수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 박현민 공인중개사, 전세 사기 피해자 등이 참석했다.
HUG는 전세반환보증 사고가 매년 증가 추세라고 설명했다. 전세반환보증은 전세계약 종료 시 임대인이 세입자의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경우를 대비해 HUG가 세입자에게 대신 보증금을 지급한 뒤 집주인에게 구상권을 행사하는 제도다. 2018년 372건에 불과했던 사고 건수는 △2019년 1,630건으로 급등한 이후 △2020년 2,408건 △지난해 2,799건으로 증가세다. 보증 사고 금액과 변제 금액도 지난해 각각 5,790억 원, 5,036억 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보증 사고의 대표적 원인으로는 '깡통전세'가 꼽힌다. 전세가격이 매매가격에 육박하는 매물을 '갭투자(전세 낀 매매)'로 매입했다가 새 임차인 확보에 애를 먹으면서 기존 세입자의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거나 악의로 반환하지 않는 것이다. 부동산 플랫폼 다방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에 지어진 연립·다세대 주택의 전세 거래 6,642건 중 27.8%(1,848건)가 전세가율(매매가격 대비 전세가격 비율) 90% 이상이었다. 지난해엔 500채가 넘는 주택을 갭투자로 사들인 뒤 임차인의 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은 '세 모녀 사건'이 적발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임차인의 대항력이 전입신고 다음 날 발생하는 법의 허점을 악용, 전입 당일 소유권을 변경하는 유형 △임대인의 세금 체납 사실을 숨기고 계약을 체결해 임차인의 보증금이 후순위로 밀리는 유형 △신탁회사의 동의 없는 계약을 맺는 유형 등이 사기 유형으로 분류됐다.
참석자들은 보증 사고를 일으킨 임대인에 대한 처벌 규정과 중개업계의 설명 의무를 강화하고 임대인에 대한 정보공개 범위를 확대하는 등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보증보험 가입 대상을 확대하고, 근본적으로는 사고 위험이 적은 양질의 전세 물량 공급을 확대하는 등 전세 시장을 안정화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원 장관은 "임차인의 소중한 전세보증금을 전세 사기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중요한 책무"라면서 "전세 사기 피해를 본 분들이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안까지 포함해서 ③이른 시일 내에 전세 피해 예방·지원 종합대책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