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어느덧 100일이 됐다. 우크라이나의 '탈나치화'를 구실로 내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특수 군사 작전'에 전 세계가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국제관계 이론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은 이미 예견된 비극이라는 분석도 많다. 이와 관련해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이름 중 하나가 영국 지리학자 해퍼드 존 매킨더(1861~1947)다. 영국 옥스퍼드대와 런던대 교수, 런던정경대 학장을 지낸 매킨더는 지정학 개념을 개척한 인물로 꼽힌다.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 지역(동유럽)을 장악하는 자가 세계 패권을 차지할 수 있다'는 매킨더의 심장지대(Heartland) 이론이 집약된 '데모크라시의 이상과 현실'이 새롭게 번역 출간됐다. 글항아리 출판사가 '현대의 고전' 시리즈로 최근 펴낸 '심장지대'는 1919년 출간된 이 책의 완역본과 1904년 왕립지리학회 강연문인 '지리학으로 본 역사의 추축', 1943년 매킨더가 미국 외교전문매체 포린어페어스에 기고한 '지정학의 세계와 평화의 길'을 한 권에 담았다.
'데모크라시의 이상과 현실'에서 매킨더는 "동유럽을 지배하는 자가 심장지대를 호령하고, 심장지대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도(World Island)를 호령하며, 세계도를 지배하는 자는 전 세계를 호령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를 합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북부까지를 하나의 바다에 둘러싸인 섬, 즉 세계도로 규정했다. 이 세계도의 중심을 이루는 지역이 심장지대로, 유라시아 북부와 내륙 지역을 말한다. 자연 방벽에 둘러싸여 있어 공격하기 어렵지만 방어하기는 쉬우며 서쪽인 동유럽 방향으로 열려 있다. 동유럽은 심장지대로 들어가는 입구다.
세계도는 심장지대와 더불어 유라시아 대륙의 한 끝인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중국 해안까지 펼쳐지는 '내부 초승달 지대', 영국, 일본, 미국 등으로 구성된 '외부 초승달 지대'로 구성된다. 매킨더는 외부 초승달 지대의 서방 해양 세력 영국과 미국 등이 유라시아 육상 세력이 심장지대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막아 인구와 부, 자원이 몰린 내부 초승달 지대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매킨더는 유라시아 개념과 더불어 육상 세력과 해상 세력 간 힘의 균형을 중요하게 다룬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을 독일로 대표되는 육상 세력이 영국으로 대표되는 해상 세력을 상대로 세계도를 차지하기 위해 벌인 전쟁으로 설명한다. 해상 세력이 육상 세력보다 본질적으로 취약하다고 생각했던 매킨더에게 지정학적으로 최적의 위치에 자리 잡은 국가는 독일, 러시아, 중국 등이었다. 그중에서도 러시아에 대해서는 최초로 심장지대 전역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세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기반을 갖췄다고 봤다. 미국 카터 행정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역시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 러시아가 세계 제국이 될지, 지역 강대국에 머무를지를 가르는 변수로 우크라이나 장악 여부를 거론한 바 있다.
이 때문에 많은 국제관계 전문가가 러시아의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을 매킨더의 이론에 기반해 심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확장하려는 유럽과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 사이의 오랜 갈등의 결과로 풀이한다.
요컨대 매킨더는 유라시아가 세계 정치의 중추 영역을 대표한다고 판단하고, 이 광활한 대륙과 풍부한 자원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효과적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심장지대의 지배를 통한 세계 지배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지키기 위해 심장지대가 전제 국가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국제질서 수립을 위해 국제연맹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그래서다.
출간된 지 100년이 지난 고전으로서 지금의 정치 환경과는 큰 차이가 있는 시점에 쓰인 책이다. 나치 영토 팽창의 논거가 된 독일 지정학자 칼 하우스호퍼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반감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의 주요 시기가 세계의 지리적 특징과 유기적 관련성을 지녔다는 주장은 현대에도 유효한 만큼 정치 현실을 해석하는 인문서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최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일간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첨단 무기 지원 계획을 밝혔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파병 등 우크라이나 전쟁 직접 관여 계획은 없다며 러시아에 타협 메시지를 띄우면서도 지속적인 무기 지원 의사를 드러내는 이유도 바로 이 같은 심장지대의 중요성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