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여자친구에게 이별통보를 받은 A씨는 몰래 촬영했던 성관계 영상을 캡처한 사진을 여자친구 명의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올렸다. 여자친구 신고로 덜미를 잡힌 A씨는 재판에 넘겨져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피해자는 엄벌을 원했지만, 법원은 "유포 정도가 심하지 않아 보인다"고 판단했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계기로 지난해 디지털 성범죄의 양형이 강화됐지만, 가해자 입장을 고려해 형량을 줄이는 판결이 여전히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31일 한국일보가 디지털 성범죄 양형이 강화된 2021년 이후 발생한 성폭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위반(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 혐의를 다룬 1심 법원 판결문 61건을 분석한 결과, 집행유예가 43건으로 가장 많았고, 벌금형이 10건, 실형 7건, 선고유예 1건으로 조사됐다. 벌금형이 절반 이상(56.5%)을 차지했던 2013~2018년과 비교하면 형량은 전반적으로 강화됐지만, 각종 감경 사유로 실형 선고가 많지 않았다.
법원이 감형 사유로 삼은 대표적 이유는 "유포 정도가 심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123회에 걸쳐 공공장소에서 여성 하반신을 촬영한 보건소 공무원은 죄질이 좋지 않음에도 실형 대신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초범이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격무에 시달려 스트레스를 적절히 해소하지 못해 범행에 이르렀을 가능성을 양형 이유로 밝혔다. 2020년 8월부터 2021년 4월까지 60회에 걸쳐 영상 통화한 상대방을 몰래 찍은 뒤 텔레그램에서 판매한 B씨도 벌금형(500만 원)에 그쳤다. 재판부는 "처벌 전력이 없고 촬영물을 유포한 정황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진지한 반성'도 대표적 감형 사유다. 여자친구의 나체를 몰래 찍은 사실이 발각되자 흉기를 들고 협박한 남성은 진지한 반성과 피해자와의 합의를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불법촬영과 공연음란죄로 이미 기소유예와 벌금형 처분 전력이 있던 피고인들도 공공장소에서 여성 하반신을 수차례 촬영했지만 반성한다는 이유로 실형을 피했다.
전문가들은 판사들이 범죄의 심각성에 방점을 찍기보다는 감형 사유에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신진희 피해자 국선 전담 변호사는 "불법촬영 및 성착취물 소지 범죄의 양형이 강화된 이유는 불특정 다수에게 유포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며 "유포 위험이 큰 사건에 대해선 형량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은의 성범죄 전문 변호사도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가 확대재생산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피해자가 어쩔 수 없이 합의를 하는 경우도 많다"며 "가중 사유를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