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임피제 싹 뒤집을 판? 대법 판결에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긴장

입력
2022.05.2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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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줄소송·파업 빌미 될까 긴장
"판례가 달라" 확대 해석 경계론도

연령만 놓고 노동자 임금을 깎는 형태의 ‘임금피크제’에 대한 대법원의 첫 위법 판결 소식이 전해지면서 각 기업들도 긴장 모드로 돌입했다. 당장, 이번 판결을 빌미로 향후 유사한 형태의 소송이 이어질 가능성부터 점쳐지면서다. 여기에 임금피크제를 고려해 연초에 세워 놓았던 경영계획도 수정해야 될 형편이다. 경우에 따라선 현재 시행 중인 임금피크제 수정이나 아예 시행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26일 재계에 따르면 기업들은 임금피크제 무효 판결에 따른 후폭풍에 촉각을 세우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이날 대법원은 퇴직자 A씨가 자신이 재직했던 한 연구기관을 상대로 낸 임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임금피크제가 노동자나 노동자가 되려는 사람을 나이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고령자고용법을 위반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정년 보장+기업 부담 완화 위해 마련된 임피제

일본 내 고령화 대책의 일환으로 시작된 임금피크제가 국내에 도입된 건 2000년대 초반이지만, 국내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제도 활용을 논의한 건 고령자고용법 개정으로 ‘60세 이상 정년’이 법제화된 2013년부터다. 정년을 보장하되, 특정 연령대 이후부턴 임금을 삭감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정부가 2015년 ‘공공기관 임금피크제 권고안’을 제시한 이후, 기업들은 업무 효율이 떨어지는 고연차 직원들의 임금을 줄이는 대신 새로운 고용을 창출하겠다며 임금피크제를 적극 도입했다.

이번 판결로 각 기업들도 분주한 모습이다. 이번 판례와 각 사 인사 규정의 연관성부터 따져보면서 회사에 돌아올 여파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기업에선 임금피크제가 사라지면 희망퇴직 등도 감소, 경영 부담 또한 가중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다만, 임금피크제 대상 직원들의 노동 강도를 낮추는 등 합리적인 대안으로 경영에 나선다면 부정적인 여진도 미미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판례로 타격 입을라"... 대기업들 긴장

대기업도 이번 판결이 몰고 올 여파 측정에 분주하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현재 나온 판결문을 보고 회사에 미칠 영향 등을 분석하고 있다"며 “그동안 운영돼왔던 임금피크제의 근간이 위법이라고 한 판결인 만큼 추후 정부에서 제시할 가이드라인을 보고 그에 맞게 제도를 손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2014년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면서 만 55세 기준으로 전년의 임금 대비 10%씩 줄여가는 식의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고숙련 반도체 핵심 인재 이탈을 막기 위해 2018년 연봉 삭감액을 5%로 줄이고, 2020년에는 적용 연령을 57세로 올려 운영 중이다.

제조업 현장에선 이번 판결이 파업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현대차의 경우 만 58세이던 정년을 만 60세로 연장하면서 임금피크제를 도입, 현재 만 59세는 임금이 동결되고 만 60세는 임금이 10% 삭감된다. 현대차 관계자는 “이날 대법원 판결이 정년을 연장하지 않으면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것을 무효로 한 것이어서 관련이 없다는 입장”이라고 밝혔지만 ‘2022 임금 및 단체협상’이 진행 중인 현대차 노조에 또 하나의 파업 명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측면에선 달가울 리 없다. 현대차 노조가 정년 연장을 요구하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임금피크제를 무효화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울 수 있어서다. 실제 강성으로 분류된 안현호 현대차 노조 지부장은 지난 25일 울산공장 본관 앞 잔디밭에서 열린 '2022년 임금 투쟁 출정식'에서 "올해 임금협상 교섭은 시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며 "우리에게는 수년간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길게는 9년, 짧게는 1년, (정년퇴직으로) 해고되는 동지들이 우리 곁에 있다. 해고자 복직 기필코 쟁취하자"고 강조한 바 있다.

“법률상 다른 사례” “중소기업에 피해 더 클 것”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의 중견·중소기업 입장에선 이번 판결이 악재일 수밖에 없다. 재무구조가 취약하고 현금유동성도 떨어진 중소기업들은 그동안 정년 연장 대신 임금피크제로 임금 부담을 덜었는데, 임금피크제가 막히면 그만큼 기업경영에 타격으로 돌아올 공산도 큰 게 현실이다. 양옥석 중소기업중앙회 인력정책실장은 "중소기업 중 정년을 둔 회사가 20% 미만이고 그 가운데에서도 임금피크제를 적용하고 있는 회사는 전체 중 4~5% 정도"라면서도 "약 6년간 운영되던 임금피크제의 효력이 부정되면 혼선이 클 것"이라고 우려했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장기화에 따른 경기 불안과 물가상승 등에 신음 중인 중견·중소기업들에 임금피크제로 인한 노사 간 갈등은 기업 경영에선 또 다른 걸림돌로 자리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 중견기업 관계자는 “앞서 정부의 적극적인 권고에 따라 제도를 도입한 기업들이 많은데, 이번 판결로 현장의 혼란과 임금 소송 남발로 인한 노사 간 갈등이 격화될 우려가 커졌다”며 “기업의 추가적인 임금 부담과 생산성 저하를 야기하지 않도록 정부도 명확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형준 기자
김현우 기자
박지연 기자
안하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