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타계한 고 김지하 시인은 군사독재 시절을 온몸으로 부딪힌 투사이자 1970년대 저항문학의 상징이었다. 바로 그 상징성으로 인해 문학 언어만큼이나 정치 언어로 더 많이 해석된 인물이기도 했다. 오랜 투병과 칩거 끝에 행보를 재개한 뒤에도 생명 운동과 율려 사상 등의 기치를 앞세우면서 독자와는 먼 자리로 향해 가는 듯 했다.
그러나 고인은 2018년까지 신작 시집 ‘흰 그늘’과 신작 산문집 ‘우주생명학’을 출간하는 등 저술 활동을 놓지 않았다. 말년의 시에서는 “남기 위해 살아오지도 않았고 기억되기 위해 쓰고 있지도 않다”고 자신의 삶을 회고했다. 고인이 남긴 글의 편린을 통해 ‘시인 김지하’를 되돌아봤다.
“황톳길에 선연한/핏자욱 핏자욱 따라/나는 간다 애비야/네가 죽었고/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두 손엔 철삿줄/뜨거운 해가/땀과 눈물과 메밀밭을 태우는/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나는 간다 애비야/네가 죽은 곳/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황톳길’ 일부)
1970년 출간된 고인의 첫 시집 ‘황토’에는 척박한 이 땅의 현실과 저항의식이 드러난다. 특히 검은 죽음에 대비되는 붉은빛은 강렬한 생명이자 사랑으로, 고인이 시로서 되고자 했던 것이다. ‘황토’ 후기에서 고인은 이렇게 덧붙인다. “세계에 대한, 인간에 대한, 모든 대상에 대한 사랑. 사랑의, 뜨거운 사랑의 불꽃 같은 언어. 나는 나의 시가 그러한 것으로 되길 원해 왔다. 사랑의 상실, 대상에 대한 무관심, 그 권태야말로 모든 우리들의 무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왼쪽도 오른쪽도 허공도 땅도 모두/지옥이라서 거네 딴 길이 없어/제길할 딴 길이 없어 어름에 거네/목숨을 발에 걸어 한중간에 걸어 이미 태어날 적에/(…)/구경꾼은 되도록/많은 쪽이 좋네 아무렴/우린 광대이니까 구경꾼은 되도록/야멸찬 것이 좋네/죽임을 죽어/박살나 피 토해도 웃겨야 하네 아무렴/죽음은 좋은 것/또 한 번뿐일 테니까”(‘어름’ 일부)
‘어름’은 줄타기 재주를, ‘어름사니’는 줄타기 고수를 일컫는다. 고인은 시 ‘어름’에서 자신의 상황을 “왼쪽도 오른쪽도 허공도 땅도 모두 지옥이라서” “잠보다 더한 이 홀로 가는 허공의 아픔”을 느끼는 어름사니에 빗대 표현한다. 정현종 시인은 1992년 김지하 시전집의 발문에서 “김지하는 전사요 영매요 광대”라고 설명한다. “혼자 싸워야 하므로 전사이고, 같이 감지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므로 영매이며, 다른 사람들은 항상 구경꾼이므로 광대”인 김지하는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북풍은 가슴을 꿰뚫고/이마 위에 눈 쌓인 시루봉이 차다//삶은 명치 끝에/노을만큼 타다 사위어가는데//온몸저려오는 소리 있어/살아라/살아라/울부짖는다//한치 틈도 없는 벼랑에 서서/살자 살자고/누군가 부르짖는다//거리에 나서도/아는 사람 없는 빈 오후에”(‘벼랑’)
오랜 수감생활의 후유증으로 인해 출감 이후 공허감에 사로잡혀 있던 고인은 벼랑 끝의 삶에서 ‘살아라’는 생명의 외침을 듣는다. 고인에게 문학은 ‘사는 것’이었다. 2002년 한국일보에 기고한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도 고인은 “시는 내게 있어 '죽음이 가득한 이 세상과 이 넋의 지옥에서 '삶'과 '사람'과 '살림'을 가져올 하나의 '활인기'"라며 “한마디로 말해 ‘살기 위해서’"문학을 한다고 요약한다.
“너무 허름해서/더 이상 쓸 수 없다//그런데 왜 젊은 날 그리고/허름한 세상을 찾아//지금/이 늙은 나이에/허름한 산간의 초라한 집을 찾아/찾아/다닐까/(…)/죽은 뒤에도/죽을 때도/여전히/찾아 헤맬 것이다/허름/허름/허름”(‘허름’ 일부)
말년의 시인은 자신의 시와 삶을 ‘허름’하다고 말하곤 했다. 2004년 출간한 아홉 번째 시집 ‘유목과 은둔’의 발문에서 그는 “내 시집 중 가장 허름하고 가장 허튼 글모음”이라며 “그런데 이 허름하고 허튼 것들이 이상하게 가엾다”고 말한다. “날더러 할아버지라 부르거나 꼰대라고 손가락질하는 젊은애들 앞에서 혼자 빙긋 웃곤 한다. 물론 종이꽃이겠지만 허름하고 허튼 꼰대며 할아버지가 되도록 살아준 내 인생에 가끔은 여기나 저기서 꽃 비슷한 것이 혹 눈에 뜨일 때도 있어서다. 그나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