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의 덫’에 빠져 휘청거리는 일본 경제의 어두운 그림자가 한국 경제에 드리우고 있다. 일본 경제의 추락을 몰고 온 엔화 약세에 따른 무역적자와 막대한 재정적자를 한국 역시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서다. 최악의 엔저에도 극심한 재정적자 부담에 제대로 된 대응조차 못하는 일본의 모습이 국가채무가 급증한 한국의 ‘가까운 미래’가 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21일 금융시장에 따르면, 미국 달러와 함께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엔화 가치는 최근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전날 엔·달러 환율은 장중 달러당 129.40엔까지 상승(엔화가치 하락)하며 2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인상 기조에도 일본은행은 마이너스 금리를 고집하고 있어 심리적 지지선인 달러당 130엔 돌파도 시간문제로 여겨진다.
1990년 거품경제 붕괴 이후 일본은 물가하락과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위적으로 엔화 가치를 낮게 유지했다. 시중에 돈을 풀어 엔화 가치가 하락하면 수출기업 이윤이 늘고, 그로 인해 임금 역시 상승하면서 경제가 활력을 되찾을 거란 ‘좋은 엔저’ 논리였다.
그러나 코로나19·우크라이나 사태로 국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자, 좋은 엔저는 돌연 ‘나쁜 엔저’로 변해 일본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당장 지난달 일본의 무역수지(수출액-수입액)는 4,123억 엔 적자를 기록했다. 8개월 연속 마이너스 행진이다. 엔화 약세로 늘어난 수출액보다 국제 원자재 값 급등에 의한 수입액 증가가 더 컸던 탓이다. 게다가 수입 물가 상승을 부추겨 서민과 중소기업의 고통도 키우고 있다.
무역적자 증폭으로 올해 연간 경상수지가 1980년 이후 42년 만에 적자를 낼 거란 전망까지 나오는데도 일본은 이를 저지할 가장 확실한 수단인 금리 인상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엔화 가치를 올리려다 자칫 국가 재정이 파탄 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258%)은 베네수엘라에 이은 세계 2위로, 일본의 재정 상태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발행한 국채 잔액도 1,000조 엔(약 9,662조 원·지난해 말 기준)에 달해 기준금리가 높아지면 막대한 추가 이자를 부담해야 한다. 일본 재무성은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1%포인트 올릴 경우 정부의 연간 국채 원리금 부담이 3조7,000억 엔(약 35조7,000억 원)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엔저를 계속 두자니 부담이고, 금리를 올려 엔화 가치를 끌어올리자니 막대한 재정 출혈과 마주해야 하는 일본의 진퇴양난은 비슷한 상황에 놓인 한국 경제에 긴박한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당장 우크라이나 사태 등 세계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원화 가치는 지속 하락하고 있다. 불과 두 달 전 1,100원대였던 원·달러 환율은 이날 전 거래일보다 2.9원 오른 달러당 1,239.0원에 거래를 마쳤다. 전날에는 장중 한때 1,240원도 넘겼다.
원화 가치 하락은 한국 경제의 버팀목인 수출을 뒤흔들며 일본의 나쁜 엔저와 유사한 ‘나쁜 원화 약세’ 효과를 불러오고 있다. 이미 올해 1~3월 누적 무역수지는 1분기 기준 14년 만에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찍었고, 이달 들어 20일까지 무역수지 역시 52억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수출액이 1년 전보다 16.9% 증가했지만 국제 에너지가격 급등에 원화가치 하락까지 겹쳐 수입액이 25.5% 늘어난 탓이다.
다행히 한국은 현재 일본과 달리 '금리 인상' 등 대응 여력이 남아 있지만, 미래에는 어찌 될지 장담하기 힘들다. 지난 5년간 재정악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일본과 같은 처지가 될 수도 있어서다. 실제 문재인 정부의 계속된 확장재정으로 2017년 660조2,000억 원이던 국가채무는 올해 1차 추가경정예산 기준 1,075조7,000억 원까지 급증했다.
현재 50% 수준인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이르면 3년 뒤 60%대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주요 선진국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낮은만큼 여유가 있다고 평가하지만, 일본 사례를 감안하면 성급한 판단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금리를 올려 원화 가치 하락에 대응해야 하는데, 계속된 확장재정으로 국가채무가 더욱 확대되면 일본처럼 대응 여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급격한 국가채무 증가로 한국이 겪게 될 경제 충격은 기축통화국인 일본보다 클 수밖에 없다”며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재정건전성을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