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라 공주 손에 쥐어진 유럽산 호박…최초의 세계화는 1000년 전에 있었다

입력
2022.04.14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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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서로 떨어져 고립돼 살아가던 공동체들을 하나의 마을처럼 묶어냈다. 공동체들이 서로 문물을 주고받기 시작하면서 물질적 풍요와 문화적 분열, 신기술의 확산이 시작됐다. 동시에 일부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전통이 사라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광저우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도시들에서는 분노한 군중이 세계화에 반발하면서 폭동을 일으키고 외국인들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늘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기원후 1000년 무렵의 풍경이다.

발레리 한센 예일대 역사학 교수는 최근 국내에 출간된 저서 ‘1000년’에서 최초의 세계화는 기원후 1000년 무렵에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당대의 문물 변화를 설명하면서 광저우의 폭동도 그 현상의 하나로 소개한다. 이에 따르면 당시는 “전 세계에 무역로가 뚫려 상품, 기술, 종교, 사람들이 본고장을 떠나 새로운 지역으로 갈 수 있게 된 때”였고 그 결과로 나타난 변화는 지배층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저자는 저서에서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최초의 세계화가 누구에 의해서, 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진행됐는지 설명한다. 역사를 영화처럼 풀어내 비전공자의 이해를 돕는다. 예컨대 1000년 무렵에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항구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중국의 취안저우(천주)의 풍경은 이렇게 묘사된다. “거리는 스리랑카산 진주 목걸이, 아프리카산 상아 장신구, 티베트산 안정제와 소말리아산 안정제가 들어간 향료, 발트해 호박을 가공해 만든 병,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항목으로 만들어진 가구를 구매하는 손님으로 북적인다. (중략) 한 상점에서는 현지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게 변형한 물건과 고가의 하이테크 상품들을 나란히 진열해 놓고 판다.”

물론 최초의 세계화는 과학기술이 몰라보게 발전한 현대의 세계화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다른 이유와 방법으로 전개됐다. 유럽 중심적 관점에서 ‘지리상의 발견’으로 불리던 15세기 무렵의 세계화와도 여러모로 달랐다. 그럼에도 1000년 무렵의 교류 확대는 ‘세계화’라고 이름 붙일 만큼, 세계 곳곳에서 진행됐다.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반도를 출발해 북대서양을 넘어서 캐나다 북동해안 뉴펀들랜드섬에 도착한 첫 유럽인이었다. 중국인과 인도인, 아랍인들도 무역로를 개척해 아라비아반도와 중국, 동아프리카 해안을 연결했다.



새로운 흐름이 나타난 배경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었다. 농업의 발전과 인구 증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지력을 보존하는 돌려짓기가 확산하는 등 농업 기술이 발전하면서 정주지와 인구가 함께 증가했다. 저자는 1000년 무렵 세계 인구가 2억5,000만 명 정도에 달한 것이 역사의 전환점이었다고 설명한다. 농업 생산이 폭증하면서 인구가 늘어났고 일부 주민은 상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도시가 성장하면서 낯선 곳에서 진기한 물건을 얻으려는 욕구와 수요가 생겨났고 마침내 세계화가 막을 올렸다.

저자는 과거에도 세계화에 따라서 이득을 얻는 집단과 손해를 보는 집단이 동시에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세계화는 고향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지배자가 개종해 백성들이 뒤따르는 일이 잦았다. 중국에서 바다를 건너온 도기가 이슬람 도공들의 삶을 위협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12, 13세기에 이르러서는 중국 푸젠성(복건성) 인구의 7.5% 정도가 수출용 도자기 생산업에 종사할 정도였다.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세계화의 영향으로 주민들이 부유한 외국 상인들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996년 파티마 왕조 해군이 건조한 선박들이 전소된 것을 계기로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주민들은 화재의 책임을 현재의 이탈리아 아말피 지역에서 온 상인들에게 돌렸고 그들의 집과 창고를 불태웠다. 이 과정에서 100명이 넘는 이탈리아인이 죽임을 당했다.

저자는 세계화는 유럽인들이 처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1000년 무렵에 만들어진 네트워크(관계망)를 1500년대에 이르러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게 확장시켰을 뿐이란 이야기다. 저자는 최초의 세계화 과정에서 모험을 떠난 공동체와 그들을 맞이한 공동체가 각자 어떤 전략을 선택했는지 돌아본다. 대결과 대화, 거부와 개방 등 역사에 기록된 다양한 사건들을 분석하고 “우리가 선조들에게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생소함에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최선인지 배우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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