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램 속 나는 정말 '나'일까.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업무를 늘 하던 대로 처리한다면 '내 일'이 맞나. 주변에서 하늘을 쳐다보면 아무것도 없어도 따라 보는 게 인간의 보편적 심리인 걸 감안하면, 남의 시선을 넘어서서 '나로 사는 일'은 어렵지만 동시에 포기할 수 없는 모두의 인생 숙제다.
이달 1일 국립정동극장에서 개막한 뮤지컬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쇼맨)는 다수의 생각에 기댄 채 살기 쉬운 우리의 삶에 제동을 거는 작품이다. 접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 독재자 대역배우로 살았던 노인 '네불라'와 한국계 입양아 출신인 젊은이 '수아'의 만남을 통해 꽤 친절하게 관객에게 사유의 시간을 제공한다. 당신도 누군가(특정 인물일 수도, 혹은 가치관이나 사회적 기준일 수도 있다)의 대역을 살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과 함께다.
미국 뉴저지 소도시의 한 동네 놀이공원에서 네불라가 자신을 사진작가라고 소개한 수아에게 촬영을 요청하면서 극은 시작한다. 네불라가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면 수아가 그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이다. 인종·성별·나이 등 무엇 하나 같지 않은 둘이 서로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순간, 막은 내린다.
네불라는 수아에게 자신의 삶을 판단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때 관객 역시 수아의 입장에서 그를 들여다보게 된다. 네불라는 파라디수스 공화국(가상의 독재 국가)에서 독재자 미토스의 네 번째 대역으로 일한 죄로 수감생활을 한 후 미국으로 이민을 온 인물이다.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한편으로는 '끝이 안 좋았어도 그 순간만큼은 소중해서 버릴 수가 없는 기억'으로 그 시절을 회상하고 '죄책감과 억울함 그 사이 어딘가'라고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며 혼란스러워한다. '알고 있지만 판단하지 않았던 생각하지 않았던' 삶, 주체성을 잃은 그의 인생을 어떤 관점으로 볼지는 수아와 관객의 몫이다.
일단 수아는 판단을 사실상 거부했다. 극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생은 내 키만큼 깊은 바다'라는 가사처럼, 누구나 안고 사는 삶의 무게를 재단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는 오히려 네불라를 거울 삼았다. 발달장애 딸이 있는 백인 부부에게 입양돼 부모를 대신해 동생을 돌보는 착한 딸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써 온 과거로 인해 자신 안에 묶였던 매듭을 풀어낸다. 주체적 삶에 한 발 더 다가간 수아가 관객에게 울림이 된다. "한 개인이 한 사회에서 온전히 주체적일 수 없다는 자각이야말로 주체성의 시작"이라는 책(김민섭 '대리사회')의 구절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쇼맨' 작가의 메시지가 정직하게 담긴 장면이다.
'쇼맨'은 올해 초 제6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작품상(400석 이상)과 연출상을 포함한 4관왕을 달성한 '레드북'의 창작진(작가 한정석·작곡가 이선영·연출 박소영)이 다시 뭉친 것만으로도 주목받는 공연이다. 지난해 제15회 차범석희곡상을 수상한 한정석 작가는 이번에도 어려울 수 있는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질문을 편안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 지난 6일 무대에 선 배우 강기둥은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젊은 네불라와 60대가 넘은 네불라를 물 흐르듯 오가며 연기하는 등 배우들이 탄탄한 연기와 조화로운 음악, 적절한 조명이 극의 자연스러움을 더했다. 네불라 역에는 윤나무·강기둥, 수아 역에는 정운선·박란주가 더블 캐스팅됐다. 공연은 5월 1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