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젊은이에게 낭만을, 국민들에게 여가 선용을'이란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1982년 3월 27일 플레이볼을 외친 프로야구가 어느덧 40돌을 맞았다. 2022시즌 KBO리그는 2일 전국 5개 구장에서 개막한다. 출범과 함께 빠르게 국민스포츠로 자리매김한 프로야구는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 양적ㆍ질적으로도 크게 성장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이전의 실업야구는 연봉제가 아닌 호봉제였다. 야구를 잘하든 못하든, 연차가 올라야 월급이 늘어나는 직장인과 다를 바 없었다. 1983, 1984년 한일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한 뒤 1985년 MBC 청룡에 입단한 김용수 전 LG 코치는 본보와 통화에서 "선수를 그만두고 은행원으로 계속 일하려면 똑같이 승진 시험도 봐야 했다"고 떠올렸다.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도입된 연봉제는 프로스포츠 시장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원년인 1982년 최고 연봉자였던 박철순(OB)의 연봉은 2,400만 원이었으나, 2022년 김광현(SSG)은 올해 연봉으로만 그 338배에 달하는 무려 81억 원을 받는다.
프로야구가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반까지 연봉 상승을 부채질한 큰 요인 중 하나는 초특급 선수 최동원(롯데)과 선동열(해태)의 등장이었다. 선동열은 1991년 1억500만 원을 받으며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억대 연봉자가 됐고, 최동원은 1985∼1990년까지 최장기간 최고연봉자로 남아 있다.
양대 산맥의 퇴장으로 잠잠하던 연봉은 1999년 도입된 자유계약선수(FA) 제도로 또 한번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2005년 삼성이 현대 심정수를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금액인 60억 원에 사들여 한 차례 지각 변동을 일으킨 FA 시장은 잠시 냉각기도 있었지만 대체로 과열돼 올해 KIA는 나성범에게 역대 150억 원을 안겼다.
하지만 최고연봉자의 연봉이 폭등한 데 반해 대다수 선수들의 연봉 상승폭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한국야구위원회(KBO)에 따르면 2022시즌 신인과 외국인 선수를 제외한 KBO리그 10개 구단 소속 선수 528명의 평균 연봉은 역대 최고인 1억6,765만 원으로 집계됐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6개 구단 선수들의 평균 연봉이 1,215만 원이었으니 40년 세월 동안 13배 상승에 그쳤다. 특히 최저연봉은 1982년 600만 원에서 2022년 현재 고작 5배 오른 3,000만 원이다.
반면 '연봉킹'은 어떤가. 김광현은 특별한 경우(비FA 다년계약)라 쳐도 2위인 추신수(SSG)의 27억 원조차 박철순보다 무려 113배 올라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 현상은 심화됐다.
선동열 전 국가대표팀 감독에 따르면 고려대 재학 중이던 1982년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러브콜을 받았던 당시 제의된 액수는 50만 달러라고 한다. 그때 환율로 환산하면 약 4억 원이었다. 당시 서울의 13평짜리 아파트가 대략 2,000만 원이었고, 대졸 사원의 초봉이 200만 원 정도였으니 선 전 감독이 제의받은 액수는 엄청난 것이었다.
1982년부터 2022년에 이르기까지 사회도 많이 변했지만 국민소득수준과 물가수준도 크게 다를 것이다. 1982년 박철순이 받은 2,400만 원은 당시 서울의 30평형대 아파트 가격이 1,500만∼2,000만 원대였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1982년 OB 매니저였던 구경백 일구회 사무총장은 "당시 대기업 직장인들 평균월급이 30만 원이 안 되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박철순에게는 연봉 외에 승리하면 20만 원, 완투하면 30만 원의 보너스를 경기 후 현금으로 바로 줬다"고 기억했다. 2022년 현재 강남 30평형 아파트 가격이 20억 원대라고 했을 때 추신수의 27억 원이 결코 박철순의 그것보다 많다고 볼 수 없는 이유다.
최고연봉자들의 연봉과 국민소득의 추이를 보면 좀 더 비교가 수월하다. 1982년의 평균연봉은 1,215만 원이었고 13년 만인 1995년에 2,000만 원을 넘겼다. 30년이 훌쩍 지난 2014년에서야 1억 원 시대를 열었다. 1982년과 2014년을 비교하면 1인당 국민소득은 20배 넘게 늘어났지만 프로야구 선수 평균 연봉은 8.8배 오르는 데 그친 것이다. 프로야구 선수들이 일반인들과 비교해서 많은 연봉을 받는다고 생각되는 건 사실이지만 '야구 재벌'은 극소수라는 것도 새삼 알 수 있다.
프로야구 역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가장 보기 좋은 지표는 올스타전 MVP 부상 변천사다. 지금도 올스타전 MVP에겐 자동차를 준다. 한국 경제를 일으킨 자동차 산업은 프로야구의 역사이자 최대의 스폰서였다.
원년인 1982년 올스타전 MVP는 김용희(롯데)였는데 부상으로 당시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한자동차의 '맵시'를 받았다. 김용희는 2년 후에 열린 세 번째 올스타전에서도 대활약하며 '맵시'의 후속 모델인 대우 '맵시나'를 또 받는 행운을 누렸다. 1983년 MVP 신경식(OB)에게 주어진 모델은 국민차 '포니'였다. 내수시장의 터줏대감인 현대차도 1990년대 초반 대우의 부진을 틈타 뛰어들었다. 폭발적인 인기를 끈 현대 쏘나타Ⅱ를 1993, 1994년 동안 부상으로 제공했으며, 이후 1996, 1997년 각각 싼타모와 쏘나타Ⅲ를 부상으로 지원하며 공격적인 스포츠 마케팅을 진행했다. 후발 주자 르노삼성의 SM5도 98년 미스터 올스타(롯데 박정태)와 함께 그라운드를 돌았다.
2010년부터 KBO리그 공식 후원사인 기아차의 시대가 열렸다. K5를 시작으로 포르테 쿱, 스팅어 등의 다양한 자동차들이 올스타들의 품에 안겼다. 코로나19 시대 전 마지막으로 올스타전이 열렸던 2019년에는 MVP에 오른 한동민(SSG)이 'K7 프리미어'를 받았다.
자동차는 올스타전 부상으로 가장 많이 지급된 상품(37번 중 27번)이다. 자동차 역시 물가 상승을 감안하면 그 값어치는 천차만별이다. 원년 김용희가 받은 맵시는 당시 450만 원 정도였다고 한다. 자동차가 흔치 않던 시절 어지간한 집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2019년 K7 프리미어도 준중형 세단이지만 3,800만 원으로 현재 집값과 비교는 언감생심이다.
프로야구 티켓은 지금까지 얼마나 올랐을까. KBO에 따르면 1982년 6개 구단은 관중 144만 명을 유치해 21억3,000만 원을 벌어들였다. 객단가(입장수입/관중수)는 1,481원이었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나 코로나19 시대 직전인 2019년 프로야구 평균 객단가는 1만1,781원이었다. 원년보다 약 8배 올랐다.
티켓 값의 실체를 제대로 들여다보려면 40년 동안 물가 상승을 감안해야 한다. 프로야구 초창기인 1985년에도 티켓 가격(객단가 1,928원)은 당시 짜장면 값(600원)의 세 배 수준으로 당시 소득 수준으론 꽤나 비싼 가격이었다. 그러다 이듬해부터 티켓 가격은 짜장면의 두 배 정도로 좁혀졌다. 1986~1988년은 3저 호황 이후 국내 소비자 물가가 크게 뛰어오른 시기였다. 당시 정부는 물가 억제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KBO에도 입장권 인상을 자제해 달라고 권고했다. 프로야구 티켓은 이때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값싼 상품'으로 여겨졌다.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특히 2005년 서울 시내 짜장면 1그릇 가격(3,222원)과 프로야구 객단가(3,766원)는 거의 비슷했다.
상황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을 딴 한국 야구가 다시 붐을 일으키면서 바뀌었다. 초창기 짜장면 세 그릇 가격이었던 티켓 가격도 한 그릇까지 떨어졌다가 두 그릇 가격으로 회복됐다. 소비자 입장에선 가파른 상승 추세가 부담으로 느껴지지만 프로야구 입장권 가격은 오랫동안 저평가돼 왔다. 종종 비교되는 영화 관람료도 최근 일부 상영관에서는 프로야구 객단가를 넘어섰다.
프로야구는 2016년 800만 관중 시대를 열며 사상 첫 1,000만 관중 시대를 꿈꿨다. 그러나 2019년에는 728만6,008명으로 800만 관중 유치에 실패했고, 2020년과 2021년에는 코로나19 여파로 관중석이 텅텅 비어 있는 날이 많았다. 지난 2년간 정규리그 총 관중은 155만6,806명에 그쳤다. 다만 2018년부터 각종 사건사고와 경기력 저하 등의 악재에서 비롯된 것이었지 프로야구 입장료에 대한 저항은 크지 않은 것으로 10개 구단은 분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