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달러화에 버금가는 안전자산으로 꼽혔던 엔화 가치가 연일 추락하고 있다. 미국 등 주요국의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에 대응해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가운데, 일본은행이 유독 금리 상승을 막고 있어서다. 금융완화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시중 금리가 상승할 조짐을 보이면 정해진 금리로 장기 국채를 무제한 사들이는 강경책을 연일 실시하고 있다.
29일 아사히신문과 NHK 등에 따르면 이달 초 달러당 115엔 선을 오갔던 엔화는 전날 외환시장에서 한때 125엔대까지 급락했다. 엔화 가치가 6년 7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하락한 것이다. 원·엔 환율도 28일 100엔당 996원으로 보기 드문 세 자릿수가 됐다. 엔화 급락의 직접적 원인은 일본은행이 ‘연속 지정가 주문’이라 불리는 조치를 단행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는 29일부터 3일 동안 10년물 국채를 이자율 0.25%로 무제한 매입하는 것이다. 실제로 29일 오전 채권시장에서 일본은행은 2,426억 엔(약 2조3,976억 원) 규모의 국채를 매입했다. 이 영향으로 10년물 국채 수익률은 0.25%에서 소폭 내린 0.245%선에서 거래됐고,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엔화 가치는 123엔 선에서 움직였다.
이미 일본은행은 장기 국채를 정해진 이율에 무제한 매수하는 '지정가 주문'을 최근 몇 차례 실시해 시중금리 상승 추세를 억제했다. 28일엔 오전 오후 두 번이나 실시했다. 하지만 미국 등 해외 주요국 중앙은행이 금리 인상을 계속할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이라 일본 국채도 '팔자'는 움직임이 강해졌고, 시중금리는 일본은행이 관리하는 변동폭의 상한선인 0.25%까지 올라갔다. 이에 무제한 매수를 한두 번이 아니라 사흘 연속으로 실시하는 초강경 조치를 결정한 것이다. 일본은행이 '연속 지정가 주문'을 실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RB)는 최근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했다. 추후 한꺼번에 0.50%포인트 올릴 가능성도 시사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다소 주저하는 모습이지만 8%대 인플레이션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달러화 가치가 높아지면 다른 국가들도 금리 인상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지난 18일 금융정책결정회의 때도 "엔저는 전체적으로 일본 경제에 플러스"라는 인식을 보여주며 엔화 가치 하락에 개의치 않고 금융완화 정책을 밀고 갈 뜻을 밝혔다.
하지만 국제 유가와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4월부터 일본의 소비자물가가 올라갈 것으로 예상되고, 일본 정부가 이를 대비한 경제 대책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지나친 엔화 약세를 용인하는 데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나온다. 아사히신문은 “기업의 해외 진출로 현지 생산이 늘어나 엔저의 수출 증대 효과가 줄었고, 오히려 원유·곡물의 수입 가격이 더 치솟을 수 있다”는 우려를 전했다.
일본 정부도 긴장한 모습이다.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29일 이례적인 엔저 현상에 대한 질문을 받고 “환율 안정은 중요하고, 급속한 변동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엔화 약세 진행을 포함해, 외환시장의 동향과 일본 경제에 대한 영향을 긴장감을 갖고 주시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