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3일 일본 국회에서 화상 연설을 통해 대러시아 경제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을 계속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일본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러시아에 압력을 가했다”며 미국과 서방 측 제재에 동참한 점을 평가했다. 또 미국 의회 연설에서 거론한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거론하지 말 것을 일본 측이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오후 6시 일본 중의원 회의실 두 곳에서 생중계된 약 13분가량의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에선 수천 명이 희생됐고, 그중 121명은 어린이였다”며 현지 참상을 전하고, "일본과 같은 책임 있는 국가들이 함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러시아가 사린 등 화학무기 공격을 준비한다는 보고를 받았다”면서 “핵무기가 사용됐을 경우 세계의 대응”을 거론하며 위기감을 상기시켰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등 국제기구가 러시아의 침공을 멈춰세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서 “새롭게 (이런 사태를) 막을 수단을 만들어야 한다”며 “일본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본은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와 중국이 거부권을 남용하는 등 부작용이 크다며 안보리 개혁과 자국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주장해 왔다. 이 대목을 콕 집어 언급해 일본의 공감을 유도한 것이다.
그는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 때는 ‘진주만 공습’, 이스라엘에선 홀로코스트 등 해당국의 역사를 끄집어 내 도움을 유도하는 연설 방식으로도 유명하다. 일본에서는 역사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우크라이나인이 일본 문화를 아주 좋아한다”며 “일본의 옛날이야기를 녹음한 오디오북 프로젝트에 참가한 적이 있다”는 개인적 경험도 소개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일본인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려는 듯 러시아가 체르노빌 원전을 공격한 점을 비롯해 원전 안전에 관한 내용에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일본 연설은 아시아권에선 처음 성사됐다. 우크라이나어로 말하고 주일대사관 직원이 동시통역하는 방식이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중·참의원 의장 등 수백 명의 의원들이 참석해 회의장을 빼곡히 메웠다. 이들은 연설이 끝나자 일제히 기립 박수를 보냈다. 당초 본회의장에 대형 TV를 설치하는 방안이 제기됐으나 뒷자리 의원은 보기 어렵고 인터넷 환경이 나쁘다는 점, 본회의장 연설은 무거운 의미가 있다는 점 등이 고려됐다고 아사히신문은 전했다.
신문에 따르면 연설 성사 과정에서 우려를 제기한 의원들도 있었다. 일본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을 할 수도 있고, 미국 의회 연설에서 ‘진주만 공격’을 언급한 대목이 꺼림칙했던 셈이다. “일본 기업은 러시아에서 전부 철수하라고 말하면 어떻게 하냐”는 걱정도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사전녹화 영상을 시차를 두고 상영하는 안도 검토됐으나 젤렌스키 대통령 측이 ‘연설의 현장감’을 원해 생중계 방식으로 합의됐다. 이번 연설에 관여한 한 의원은 진주만 공격에 대해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사전에 요청했다고 아사히는 전했다.
일본은 미국과 유럽의 강력한 대러 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1억 달러에 달하는 지원금을 제공했으며, 폴란드를 통해 자위대의 방탄복과 헬멧 등을 보냈다. 난민 수용에 지나치게 보수적인 일본임에도 지난 14일까지 우크라이나 난민 54명이 일본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