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목숨을 구한 허준, 감염병 치료했다?

입력
2022.03.19 11:00
이승렬 대구 편한세상한의원  원장의 재미있는 한의학 이야기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구암근린공원의 또 다른 이름은 허준공원이다. 구암(龜巖)은 '동의보감'을 편찬한 조선시대의 명의인 양평군(陽平君) 허준의 아호다.

동의보감은 세계 의학 서적중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고 국보로 지정되기까지 했는데 이 책을 완성한 곳은 '허가바위'라는 동굴이다. 성인 20여명이 기거할 수 있는 이 동굴은 임진왜란 시에는 피난처로 사용되었다.

동의보감은 임진왜란 당시인 1596년 허준이 선조의 명으로 의관들과 함께 우리나라와 중국의 의서를 모아 엮어 집필한 책이다. 선조가 승하한 이후 자신의 유배지이자 출생지이기도 했던 경기도 양천현의 허가바위에서 혼자 정진해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허준이 선조의 사후 정치싸움 당쟁의 희생양으로 유배를 가게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양반이 아닌 중인출신의 의관이었던 허준은 당시 종3품 당상관이라는 대신의 직위에 있었다.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의 큰 공로를 인정해 허준을 정1품으로 승진시키려 했지만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선조 사후 허준에 대한 탄핵의 빌미가 되었고 특히 광해군보다는 어린 영창대군을 선조의 후계자로 옹립하려 했던 당시 소북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이 내의원을 지휘하던 약방도제조의 직위를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영경과 한 묶음으로 탄핵되어 귀양을 가게 되었다.

함경도로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고 죽은 유영경과 달리 허준은 '문외출송(門外黜送)'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받았다. 문외출송은 죄지은 신하의 관작을 모두 빼앗고 임금이 있는 한양도성 밖으로 추방하던 형벌이다. 그래서 허준은 도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신의 출생지인 경기도 양천현에서 유배생활을 했고 홀로 의서집필에 정진하여 마침내 최고의 명저 동의보감을 완성할 수 있었다. 광해군은 신하들의 탄핵 요구가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허준을 향한 각별한 애정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허준은 광해군이 왕자이던 시절 인류역사상 최악의 치명적인 바이러스전염병인 천연두를 앓게 되었을 때 한의약으로 완치시켜 목숨을 구했다. 이 공로로 선조의 신임을 받아 양반신분이 아님에도 종3품 당상관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목숨을 건진 광해군이 훗날 임진왜란 때 왕세자의 지위에 올라 선조의 명으로 분조(分朝)를 이끌면서 의병을 규합하고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왜군과의 전투를 일사불란하게 총괄지휘할 수 있도록 혼란을 수습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광해군은 어린시절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허준을 부왕인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도성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유배를 보내 동의보감 편찬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배려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 광해군은 허준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공로를 기려 정1품 양평군(陽平君)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추존했다. 이는 조선시대 어떤 의관도 오르지 못한 전무후무한 최고품계의 관직이었다.

사실 한의약은 감염병 바이러스 질환에 효과가 뛰어나다. 최초의 백신인 종두법도 동양의학의 인두법에서 유래한 치료법이고 상한론(傷寒論)에서 시작하여 수천 년간 호흡기 전염병의 치료체계를 다져온 게 바로 한의학이자 한약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변이인 오미크론변이 대확산의 시기에 방역당국이 특정집단 눈치 보기에 급급해 한의약 치료를 국가의 공공의료에서 배제시키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이승렬 편한세상한의원 대구본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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