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초월한 인류애는 ‘재정 부족’이라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도 지속될 수 있을까. 러시아의 침공을 피해 우크라이나를 탈출한 피란민이 300만 명을 넘어서면서 이들을 떠안은 이웃 국가들의 부담도 늘고 있다. 갑작스러운 전쟁으로 고향을 등진 피란민을 끌어안는 온정의 손길은 여전하지만, 지원 여력이 줄어드는 탓에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진다. 언제까지나 소수의 ‘선의’에 기댈 수 없는 만큼 국제사회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16일(현지시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영국 BBC방송 등을 종합하면, 우크라이나 난민 규모가 늘면서 국경을 맞댄 폴란드에 가해지는 경제사회적 압박도 커지고 있다. 폴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우크라이나 난민을 받아들이고 있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지난달 24일 개전 이후 지금까지 306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자국을 떠났고, 절반이 훌쩍 넘는 190만 명이 폴란드에 유입됐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수도 바르샤바와 크라쿠프시(市)는 몰려오는 피란민으로 인구 포화상태다. 3주 만에 각각 인구 수가 각각 15%, 14% 늘었다. 호텔 등 지역 숙박업소는 빈 자리를 찾기 어렵다. 쇼핑몰과 병원까지 난민 수용소로 탈바꿈했지만 계속 밀려드는 난민들을 감당하기 벅차다. 크라쿠프시는 최근 이들을 도시에서 버스로 5시간 30분가량 떨어진 폴란드 서부 고주프비엘코폴스키시로 이동시켜야 했다.
난민들이 몰리면서 각종 인프라도 한계 수위에 올랐다. WSJ는 “밀려드는 인파로 학교, 교통 시스템 압박이 커졌고, 폴란드가 가난한 국민들을 위해 마련했던 정부 주택도 우크라이나인들이 차지한 상태”라며 “정부가 오는 19일부터 난민들에게 아이디를 발급하고 치료 자격을 부여하면서 의료 시스템마저 압도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안토니 프리체크 크라쿠프시 관리자는 “주거, 교육, 의료용품까지 도시는 한계에 다다랐고, 곳곳에서 무력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참담한 전쟁을 겪은 이웃들을 향한 도움의 손길을 거두지는 않고 있다. 폴란드 시민들은 연일 자원봉사에 나서며 난민들의 끼니를 챙기고, 낯선 이에게 기꺼이 안방을 내주고 있다. 문제는 지속가능성이다. 외부 지원 없이 특정 도시와 나라에 계속 희생을 강요할 경우 내부에서 불만이 먼저 터져나올 수밖에 없는 탓이다. 당장 일각에서는 “우크라이나인들은 무료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교통 인프라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내는 시민들은 그렇지 못하다”라는 불평이 나오는 현실이라는 게 WSJ의 설명이다. 야체크 마이흐로프스키 크라쿠프 시장은 “시민들을 위해 준비됐던 몫마저 난민들에게 돌아가고 있다”며 “시는 이미 460만 달러(약 56억 원)에 달하는 위기예비자금을 모두 소진했고 이제 다른 곳에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이로 인해 국제사회가 재정 도움에 나서는 것은 물론, 난민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라파우 트샤스코프스키 바르샤바 시장은 “우리는 서서히 압도당하고 있다”며 “더는 즉흥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 국제적 지원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를 비롯,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피렌체, 독일 베를린 등 유럽 주요 도시 시장에게 우크라이나 난민 수용을 호소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접경지인 폴란드 남동부 자모시치시의 안제이 브누크 시장 역시 BBC방송에 “난민 물결 속에서 유럽연합(EU)이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우리를 내버려뒀다”며 “재정적 도움이 없을 경우 환대의 질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소수의 국가가 책임을 떠안은 만큼, 세계은행 같은 국제기구가 저리대출 같은 실질적 협조에 나서야 한다는 제안(미국 비영리기구 국제개발센터)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