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중도 버린 트럼프 지지자들...'우크라이나 음모론'에 힘 실은 까닭은

입력
2022.03.19 17:00
반(反)코로나19 백신, 친푸틴 성향 그룹 큐어넌
'우크라이나 실험실 음모론' 제기하자
러시아·중국 정부, 같은 주장하며 여론 만들기 나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온라인 음모론자 집단 '큐어넌(QAnon)'은 트럼프 집권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反)중국 음모론을 퍼뜨렸다. 미국과 중국이 무역 분쟁으로 맞서는 분위기 속에서 정부의 수장이 트럼프였고, 중국은 그들이 척결해야 할 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이들이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하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대거 친(親)중국으로 돌아서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의 '서방 책임론'에 불을 지피기 위해 '우크라이나 생화학 실험실 음모론'을 꺼내자 큐어넌도 여기에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바이든 정부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의무화 정책에 반대하면서 이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침공을 정당화하는 데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큐어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실험실 26개 운영... 공격 음모" 주장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월 말부터 친러시아 성향 채널과 큐어넌 사이에선 '우크라이나 실험실 음모론'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음모론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미국이 전 세계 336개 생물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중 26개는 우크라이나에 있다""미국이 전염병을 제조해 퍼트리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틱톡 등 다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USBioLab(미국생물연구소)이라는 해시태그를 통해 퍼져나가고 있는 이 주장의 씨앗은 러시아와 중국에서 나왔다. 중국 정부는 "코로나19 진원지가 우한 생명공학 연구실"이라는 주장에 맞서 "미국의 포트 데트릭(생물학 무기 연구 시설)이 진원지"라는 주장을 펼쳐 왔다.

이 '떡밥'은 그동안 반중 운동을 줄기차게 펼쳐 온 미국의 극우 진영에서 재생산됐다. 큐어넌 운동가들은 코로나19가 거대 권력에 의해 제작됐다는 음모론을 밀고 있는데, 미국 정부가 외부에서 생물 실험실을 운영한다는 내용이 이들의 음모론에 들어맞은 것이다. 비슷한 주장은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안티백서' 커뮤니티에서도 공유되고 있다.

극우 인터넷 방송 '인포워스'와 폭스뉴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들이 유사한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폭스뉴스는 8일 마코 루비오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이 빅토리아 널랜드 국무부 정무차관에게 관련 주장에 대해 묻자 "우크라이나의 생물학 연구시설이 러시아에 넘어가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답한 것을 실제 생물 무기 시설이 있다는 식으로 오도했다.


'큐어넌 음모론'을 유엔 안보리에 들고 간 러시아·중국 외교부


러시아는 1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특별회의를 소집하고 미국이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생화학 실험을 펼쳤으며 러시아를 상대로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바실리 네벤자 주유엔 러시아 상임대사는 "박쥐, 새, 곤충이 곧 유럽 전역에 위험한 병원체를 퍼트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코로나19와 관련해 미국과 중국 양쪽에서 제기된 '인위적 제조 음모론'과 구조가 비슷하다. 중국도 러시아의 주장에 사실상 동참하며 "실험실을 국제사회에 공개해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공식 입장을 냈다. 음모론에 불과했던 내용이 국제 회의에서 공식화한 것이다. 미국은 옛 소련 블록 국가에 생화학 연구소 다수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줬지만, 신종 전염병을 탐지하는 공중보건 시설이며, 이들 시설과 관련된 정보는 모두 공개돼 있다고 반박했다.

큐어넌 관련 그룹은 과거 '코로나 음모론' 때문에 중국에는 적대적이었지만 러시아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는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러서는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큐어넌이라는 기묘한 음모론 동맹이 만들어졌다.

온라인의 극단주의 연구자들은 큐어넌이 모이는 채팅 앱 텔레그램의 대화방에서 "대만에도 미국이 운영하는 생화학 연구소가 있다"며 음모론을 중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부풀리려는 '친중화' 양상도 보인다고 전했다. 극단주의적 콘텐츠를 추적하는 영국의 싱크탱크 전략대화연구소(ISD)는 "큐어넌을 중심으로 한 극단주의자 그룹이 친중국으로 돌아서게 될 경우, 중국의 관영 언론은 러시아처럼 이들을 적극 이용하려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