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 박수처럼 들리는 북소리에 리코더 연주가 들려온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대표 음악(웨이 백 덴·Way back then)은 도입부 단 10초 만으로도 전 세계인을 긴장케 한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 드라마 음악으로 세계적 호평을 받은 음악감독 정재일이 이번엔 가장 한국적인 창극으로 돌아왔다. 국립창극단의 신작 '리어'를 통해서다. 창극 작업은 2017년 '트로이의 여인들' 이후 두 번째다.
정재일은 음악감독 자리에서 내려와 '리어'의 반주 음악 전반을 맡았다. 오랜 음악적 동료인 한승석 음악감독이 작창을 포함해 전체 그림을 그리면 나머지를 채우는 역할이다. 화려한 성과를 뽐낼 수 있는 선택은 아니다. 이달 11일 진행한 화상 인터뷰에서 정재일은 "(작곡가로서) 창극 작곡은 큰 매력이 없다. 내가 무언가를 해내는 일이 아니다"라면서도 "내가 한 부분을 담당한 창극의 완성본을 관객으로서 보는 게 행복하다"고 밝혔다. 우리 소리, 창극에 대한 열정적 '팬심'이 작업의 원동력이다.
무엇보다 현대적 음악과 서양적 화성을 결합해 판소리 시김새와 선율의 독특한 매력을 증폭시키는 데 집중했다. 그것이 전통적 음악 어법이 낯선 현대 대중에게 접근하는 법이라고 봤다. 국악기와 서양악기가 어우러진 13인조 구성의 음악으로, 가상악기 소프트웨어를 활용한 앰비언트 사운드를 조합했다. "특히 소리꾼인 한 감독이 소리꾼의 극한을 실험하는 듯한 판소리를 짜놓았는데, 배우들이 이를 완벽하게 소화해낼 수 있게 연결을 구상하고 (음악으로) 감싸주려고 했어요." 한 감독과는 오래된 인연이다. 이들이 함께 낸 앨범 '바리 abandoned(애번던드)'(2014), '끝내 바다에'(2017)는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크로스오버 음반'에 오르는 성과도 냈다.
셰익스피어 '리어왕'을 창극 '리어'로 바꿔 놓은 배삼식 작가와의 인연도 깊다. 정재일은 "'트로이의 여인들'도 그랬지만 서양 고전을 우리 이야기처럼 만든 텍스트가 좋았다"며 감탄했다. 삶의 비극과 인간에 대한 원작의 통찰을 물(水)의 철학으로 일컬어지는 노자 사상으로 엮은 부분을 음악으로도 살리고자 했다. "고대로부터 내려져 온 것 같은 소리랄까요. 물이 흘러가고 물방울이 흩어지는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찾아보려고 했어요." 또 각 인물의 특성을 살렸던 '트로이의 여인들'과는 달리 극을 관통하는 메시지에 중점을 뒀다. 중심인 판소리 선율의 위아래를 감싸는 음향이 드라마의 분위기를 만들 수 있도록, 음향과 화성이 퇴적암처럼 쌓여가는 이미지를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리어'는 80대 노인인 리어왕 역을 30대 소리꾼인 김준수가 맡는 등 파격 캐스팅으로도 화제다. 그 덕분에 정재일은 젊은 배우들과 많은 실험을 했다. "한 감독이 (출연진들이) 한참 후배라고 마음 놓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한 것 같아요. 저러다 쓰러지는 것 아니야 할 정도로. (웃음) 그 선율을 보필하려고 더 실험적이고 더 다양한 표현을 해내야 했죠."
그의 다음 목표지는 어딜까. 정재일은 "음악이 주인공인 것을 해보고 싶다"며 "무대 생음악을 연주하는 것만의 즐거움이 크다고 생각해서 이것저것 해보고 있는데, 올가을에는 열매를 맺어 보려 한다"고 말했다. '리어'는 일부 출연진의 코로나19 확진 판정으로 기존 개막일(17일)이 오는 22일로 지연됐다.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2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