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직원을 엽기적인 방법으로 살해한 스포츠센터 대표가 법정에서 범행을 인정하면서도 피해자가 숨진 건 경찰의 조치가 미흡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0일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2부(부장 안동범)는 살인 혐의로 구속기소된 한모(40)씨에 대한 첫 공판을 진행했다. 한씨는 갈색 죄수복 차림으로 마스크를 쓰고 출석했다. 한씨 변호인은 "피고인은 수사 과정에서 모든 범행을 인정했으며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씨는 지난해 12월 31일 새벽 자신이 운영하던 서대문구 소재 어린이스포츠센터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직원 A씨를 폭행하고 플라스틱 막대기로 항문을 찔러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다. 범행 직후 한씨는 당시 주량의 3배 정도 술을 마셔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변호인은 그러나 한씨의 폭행이 피해자 사망으로 직결된 건 아니라고 변론했다. 한씨가 A씨를 폭행하면서 112에 신고했는데도 경찰이 신고 내용과 장소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고, 경찰의 초동 조치가 미흡하지 않았더라면 A씨가 숨지지 않았을 거란 주장이다.
변호인은 "112 지령실의 실수로 신고자 주소가 잘못 전달돼 신고 후 16분이 지나서야 출동이 이뤄졌다"며 "피고인은 '어떤 남자가 와서 누나를 때린다'고 신고한 사실이 없는데도 잘못된 내용이 전파돼 출동한 경찰관들이 엉뚱하게 여성을 찾는 데 집중했다"고 말했다. 이어 "출동 경찰이 A씨 상태를 1분 20초간 확인했는데도 이상징후를 발견하지 못한 건 피해자가 생존해 있었다는 의미"라며 "피해자 보호 조치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사망에 이르지 않았을 개연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씨 측은 재판부에 이와 관련한 전문기관 감정 및 사실조회를 요청했다.
방청석에 앉은 유족들은 한씨에게 얼굴을 공개하라며 거칠게 요구했다. 피해자 아버지는 재판이 끝난 뒤 취재진에게 "경찰이 초동 조치만 제대로 했어도 죽지 않았을 거라고 피고인 측이 주장했는데 이건 아니다"라며 "가해자가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주는 게 법이냐"라고 토로했다.
검찰은 이날 공소사실 낭독을 통해 범행 경위를 보다 자세히 밝혔다. 이에 따르면 한씨는 사건 당일 A씨가 신발을 신고 스포츠센터 실내에 들어서자 A씨를 바닥에 밀쳐 넘어뜨리고 폭행했다. 한씨는 바닥청소를 하는 자신을 A씨가 껴안는 행동을 반복하자 이에 격분, 청소기 봉으로 얼굴과 몸통, 엉덩이 부위를 수십 대 때리고 어린이용 허들로 쓰는 지름 3㎝, 길이 70㎝의 막대를 항문에 밀어넣었다. A씨는 심장 등 장기가 파열되는 관통상을 입고 숨졌다.
다음 재판은 다음 달 7일 오후 2시 30분에 열린다. 검찰은 이 자리에서 현장 폐쇄회로(CC)TV 영상 일부를 재생하면서 사건 경위를 설명한 뒤 증인 심문을 진행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