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국헌 빛그림방 대표 “사진은 나의 운명”

입력
2022.03.05 10:20
자라나는 딸의 모습 담기 위해 사진 시작 
외부 강연 늘어나면서 직장 그만두고 외길로 
딸과 사위도 사진 동호회에서 만나 결혼



윤국헌(73) 사진연구소 빛그림방 대표에게 사진은 운명이다. 윤 대표에게 사진은 딸이 크는 모습을 영상으로 남기기 위한 순박한 취미로 시작됐다. 그러나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사진은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변했다. 남들은 들어가지 못해 난리인 직장 한국조폐공사를 때려 친 것이나, ‘백년손님’ 사위를 얻게 된 것도 다 사진 덕분이었다. 제자 19명과 함께 이룬 장기 프로젝트 ‘대구를 보다10’ 역시 그가 쏟아 부은 10년간의 운명적 몸짓이라 할 수 있다. 그 속에는 신천, 석조물, 길, 다리, 공원, 축제, 서원과 고택 등 대구와 운명을 같이 할 유ㆍ무형 문화재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사진과 첫 인연

윤 대표는 말한다. "제2의 인생을 열어준 사진을 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딸의 탄생이었다"고. 태어난 순간부터 결혼식까지의 역사를 사진에 담아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결혼 선물로 주기 위함이었다. 보다 예쁜 사진을 찍기 위해 틈날 때 마다 딸에게 포즈 취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무렵 딸은 솔직하지만 충격적인 말을 했다.

"아빠 나 사진 찍히는거 싫어!"

딸의 반응은 섭섭했지만 그간 맺었던 사진과의 인연은 완전히 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30년 전 직장생활을 할 때 사진과의 본격적인 두 번째 인연이 다가왔다. 사보 제작은 물론 회사에 손님이라도 방문하는 날이면 사진 촬영을 자원해서 했다. 언제부턴가는 동료 사원들의 돌 찬치 및 부모님의 칠순 사진 부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한번도 귀찮다거나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 없고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피곤한 줄 모르고 했다"고 말한다. 회사는 윤 대표의 이러한 봉사 활동을 긍정적으로 인정, 매월 1회 사외 사진 관련 강의를 허락해 주었다.

선택의 기로에 서다

매월 1회 사외 사진 강의가 인기를 끌면서 월 2회, 3회, 4회로 횟수는 물론이고 시간도 대폭 늘어나게 됐다. 처음 눈 뭉치를 굴릴 때는 조그마해 별다른 힘이 들지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가 커지면 점차 힘이 달릴 수밖에. 직장 일을 보면서 하던 사진 강의를 접든지 아니면 여기에만 매달려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더 늦으면 후회할 것 같았지요. 무엇을 먹고 입을까 보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죽기 전에 좋아하는 일 한번 해 보고 죽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23년간 잘 다니던 직장을, 그것도 남들은 못 들어가서 난리인 한국조폐공사를 그만 둔다고 하니 가족의 반대가 심했다. 당시 딸은 대학교 졸업을 2년 남겨놓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아내가 만류를 해도 안 되니, 지인들을 만나 남편을 설득해달라며 부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떻게 가족을 설득했냐고요? 설득 안했습니다. 설득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강행했죠."

가족의 반대는 윤 대표조차 당연하다고 여겼기에 설득은 진즉에 포기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나아가기로 했다.

"사진 찍고 싶은 날 찍고, 가보고 싶은 곳 원하는 날에 가서 촬영하고 싶었다. 말로만 듣던 늦바람, 내가 생각해도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후 이력은 화려하다. 대구대학교에서 20년 넘는 세월을 후학을 지도하는 기쁨을 누렸고,그 후 일흔이 넘긴 지금까지 사진연구소 빛그림방 대표를 맡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예총으로부터 한국예술문화명인 그랜드 마스터 인증을 받은 영예를 얻은 것도 퇴사라는 과감한 결정을 한 덕분이었다. 당시 만류하며 혀를 차던 친구들은 지금 도리어 그를 부러워한다. 일흔일곱의 나이에 여전히 왕성하게 사회 활동을 하고 즐기면서 일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 사진

그는 가장 기억나는 작품으로 1982년 테레사 수녀가 대구시립희망원을 방문, 야외 미사 때 찍은 사진을 꼽았다.

"일반인 신분으로 항상 뉴스나 잡지 속에서만 보던 수녀님을 뵙고 사진에 담을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했었죠. 만인을 위해 희생과 봉사를 하시는 분의 모습에서 그분의 삶의 흔적을 어떻게 끌어낼 수 있을까, 이를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서는 넘치는 인파에 떠밀려 카메라 셔터 누르기조차 어려웠고 각도는 물론 초점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해 흐릿한 사진이 되어버렸습니다"

윤 대표는 "그때 그 사진은 수녀님께서 아이들의 손을 잡고 기도해 주시는, 나름대로 가장 기억에 남는 제 작품으로 남아있다"고 회상했다.

사진이 맺어준 가족

시간이 꽤 흘러 딸이 사범대학 졸업 후, 서울에서 교사 생활을 할 때였다. 그 무렵 윤 대표는 대구 코엑스에서 열린 '이미징 코리아'라는 사진 전시회 총감독을 맡아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딸이 전화로 갑작스레 주말에 대구에 내려갈 일이 생겼다고 했다. 그 참에 남자 친구를 소개하고 싶다며, 시간을 내어 달라며 떼를 쓰는 것이었다. '이미징 코리아' 사진 전시회 일로 도저히 시간이 나질 않을 것 같아서 딸에게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거꾸로 물었다. 돌아온 대답을 듣고 그는 놀랐다. 코엑스에서 열리는 '이미징 코리아'라는 사진 전시회에 간다는 것이었다.

"그때 알았죠. 초등학교 시절 모델 노릇 더 이상 하기 싫다고 했던 딸 아이가 이후 나도 모르게 운명처럼 사진을 하고 있었구나 하고. 솔직히 기분 좋았습니다. 지금의 남편과는 사진동호회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키웠다고 합니다."

사진이 매개체가 되어 만난 두 사람은 그가 총감독을 맡고 있던 사진 전시회를 관람하기 위해 서울에서 대구로 왔다. 세 사람은 그곳에서 첫 만남을 가졌고 남자 친구는 지금 딸아이의 남편이, 윤 대표 부부에게는 '백년손님'이 됐다.

이처럼 사진은 윤 대표 가족들에게 거역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온 셈이다. 윤 대표는 스스로 다짐하듯 말한다. "카메라를 들 힘이 남아 있는 순간까지 피사체에 앵글을 맞출 것이며 내 사전에 은퇴란 없다"고.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처럼 마지막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사진을 할 것입니다. 아마도 나는 가장 행복한 사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내내 윤 대표는 낡은 카메라를 보물처럼 움켜쥐고 있었다. 윤 대표는 올해 11월 아양아트센터에서 '존재의 흔적'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전에 이어 12월에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금호강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기획전을 연다.

박상은 기자 subutai117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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