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는 동심으로 쓴 시입니다."
예전에는 조금 달랐다. 교장 선생님이 훈계하듯 쓴 동시, 어리광부리는 투의 시가 대부분이었다. 박방희(76) 시인은 다르다. 2005년 '푸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그의 시는 아동문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동심으로 쓴 시'가 해당 분야에서 주류로 자리 잡는 신호탄이었다. 박 시인은 현재까지 10여 권의 동시집을 냈고, 그중 2편은 교과서에도 실렸다.
그의 시는 어른의 입장에서 아이에게 전달하고픈 교훈을 담은 시나 어린아이인 척 하는 시가 아니라, 그야말로 아이의 마음이 담긴 시를 쓴다. 일반적인 상식, 통념에서 벗어나 어린이의 마음으로 순수하고 맑은 동심이 드러나는 시다. 박 시인은 동시를 배우러 오는 제자들에게 '모방'을 시작 요령으로 가르치기도 한다. 아이들 곁에서 아이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옮겨만 적어도 시가 된다는 생각에서다. 박 시인의 동시에도 아이들이 입에서 나온 듯한 시로 그득하다. 어린이의 마음이 빚은 어린 말들이 모두 시어가 된다. 박 시인은 "어린이들과 함께하는 교사, 손자 손녀가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동시를 쓰는 데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박 시인도 처음부터 동시를 쓴 것은 아니었다. 시로 출발했고 다수의 시집을 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 하나 사연 없는 사람이 없지만, 세상은 그가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젊은 시절 공무원 생활을 잠깐 했다. 그러다 1969년에 검찰 수사관 시험에 도전해 합격했는데, 이때 생각도 하지 못한 난관을 만났다. 연좌제였다. 자신이 연좌제에 해당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하릴없이 합격증을 허공에 날릴 수밖에 없었고, 이때부터 ‘민주화’라는 뜨거운 화두가 그의 가슴에 싹텄다.
대구 동성로에 1.65㎡(반 평)짜리 점포를 얻어 아내와 함께 장사를 시작했다. 동시에 민중시를 쓰면서 '민주화' 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시를 썼던 만큼 문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우리문화연구회' 운동도 그중의 하나였다. 우리문화연구회에는 지역대 교수들이 대거 참여했고 산하에 문화패, 연극패, 노래패 등이 있었다. 우리문화연구회를 중심으로 문화계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정보 당국의 탄압으로 많은 이들이 탈퇴를 했지만 노래패와 연극패는 그대로 남았다. 박 시인은 몇 년 간 우리문화연구회 대표를 맡아서 활동했다.
"1987년, 그리고 그 성과로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민주화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랜 마음의 응어리도 조금씩 풀리더군요."
그 즈음 동시를 만났다. 자신이 쓴 시를 읽다가 그 안에서 '동심'을 발견했다. 민주화에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든 것도, 그 위험한 '대표' 직을 덥석 맡은 것도 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있어서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화를 위해, 숨통을 트기 위해 시를 썼다면 민주화 이후의 시는 달랐다. 그의 시는 동심으로 또 자연으로 돌아갔다.
"저는 종교가 없어요. 자연이 제 종교입니다. 고향이 성주인데 어린 시절에 늘 걸어서 학교를 다녔어요. 사시사철, 하루하루 변하는 자연의 풍경을 보면서 깊은 경외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학교로 걸어가던 시절의 마음으로 시를 썼습니다."
2001년 동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동시가 체질이라고 했다. 박 시인에 따르면 동시가 잘 팔린다는 이유로 시에 도전하는 시인이 적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 실패한다. 쉽고 어렵고를 떠나 동심으로 시를 쓰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박 시인은 "나처럼 애 같은 데가 있어야 한다"면서 "세상의 논리대로,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살았다고 자부한다. 내가 동심을 간직한 비결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동시는 어른이든 아이든 '어린이의 마음과 생각'으로 표현한 '시'입니다. 거기에는 특별히 '어린이를 위하여'라는 전제도 없습니다. 오로지 문학으로서 동시가 있고 동화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동시야말로 문학의 시작이자, 인간의 원초적 정서를 담아내고 표현하는 가장 고급한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생 동심을 품고 살아온 박 시인은 요즘 어린아이보다 더 자유롭다. 마음 가는 대로 해도 거칠 것이 없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잔다. 걷고 싶을 때 걷고 쓰고 싶을 때 쓴다. 한 마디로 "박방희로 살아가는 삶의 순도"가 100%에 가깝다.
"글 쓰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자유입니다. 이것저것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 자유가 보장될 때 최대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죠."
지난날의 보상일 수도 있겠다. 연좌제에 묶여 젊은 시절의 꿈을 포기하고 민주화 운동으로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숱하게 겪었다. 투쟁과 상실의 연속이었다. 울분에 북받치고 이상에 취해 달떴던, 그 치열한 시절에 대한 보상으로 그에게 자유가 찾아왔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최근 그는 새로운 일에 뛰어들었다. 소설이다. 진작부터 소설을 쓰고 있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써볼 생각이다.
"소설은 인생과 세상에 대해 가장 발언하기 좋은 형식인 것 같습니다. 소설이란 그릇에 저의 생각과 철학, 그리고 인생을 다 담아보려 합니다."
박 시인은 "동시로 어린이의 마음을 노래하고 어린이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었듯, 또 소설을 통해 나름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시 '인생'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바닥에 떨어진 꽃을 보고
그제서야 나무 위를 쳐다보네.'
꽃 같은 동시가 그랬던 것처럼, 동백보다 붉은 그의 소설이 정신없이 앞만 보고 살아온 평범한 인생들에게 ‘나무 위’를 쳐다보는 계기를 만들어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