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러시아와 서방 진영 간 갈등으로 오랜 역사 속 사건이 소환됐다. 1945년 2월 구소련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휴양지 얄타에서 열린 얄타회담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질서를 규정한 세기적 사건인 얄타회담은 세대가 바뀌며 기억의 윤곽이 흐려져 가는 외교사적 장면이기도 하다. 얄타회담으로 세계는 냉전에 빠져들었고, 독일과 한반도 분단의 씨앗이 잉태됐다. 그런 얄타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소련 연방에 속했던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금지를 요구하면서 다시 회자되고 있다. 강대국 사이에서 상대적 약소국의 운명이 결정되는 '얄타 2.0'을 거론하는 이들이 많다.
'얄타의 딸들'은 현 국제 안보 지형의 토대가 된 20세기의 결정적 사건인 얄타회담을 흥미진진하게 되돌아보게 한다. 책은 1945년 2월 4일부터 총 8일간 열린 얄타회담을 약 5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풀어냈다. 중요한 것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세 거두'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이다. 책의 주연은 '작은 세 사람(Little Three)'으로 불린 루스벨트의 딸 애나 루스벨트, 소련 주재 미국 대사 애버럴 해리먼의 딸 캐슬린 해리먼, 처칠의 딸 사라 처칠이다. 역사가인 저자는 회담장에서 일어난 일을 가족과 친구에게 보낸 편지와 개인 수기로 남긴 딸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8일간의 회담 과정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3국 정상의 정치적 리더십보다는 세 딸의 시선으로 본 정상들의 인간적 면모와 가족과의 관계 등에 방점이 찍혔다.
책은 미리 모스크바에서 얄타로 이동해 리바디아 궁전의 회담 준비를 감독하는 캐슬린의 여정으로부터 시작한다. 러시아어를 공부한 캐슬린은 얄타회담장을 꾸미고 참석자의 자리 배치와 의전 등을 진두지휘했다. 종군 기자이자 스키 챔피언이었던 그는 아버지가 소유한 아이다호의 선밸리 스키 리조트의 운영을 몇 주씩 맡곤 한 경험이 있었다.
사라는 처칠 수상의 마음의 짐을 나눈 버팀목이었다. 연극배우로 활동하다 영국 공군에 입대해 항공사진 판독 소대장을 지냈던 사라는 처칠의 정치적 결정에 영감을 주는 딸이었다. 당시 유럽 내 영국의 위상과 폴란드 망명정부에 대한 책임감으로 정치적 압박을 받던 처칠은 회담 기간 내내 사라에게 많은 부분을 의존한 것으로 전해진다.
세 아이의 엄마이자 신문 편집자였던 애나 루스벨트의 주된 임무는 처칠과 스탈린이 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알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외교와 사교술이 성패를 가를 정상회담에서 급성 울혈성 심부전 진단을 받은 아버지의 건강 문제는 치명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에 따르면 '작은 세 사람'은 물론 역사 속 큰 인물로 기록된 세 거두 역시 결국은 필부필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세계를 움직이는 외교 안보적 결정을 내린 이들에게도 전쟁 이후의 삶은 고달팠다. 회담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루스벨트는 1945년 4월 사망했고, 처칠은 총선에서 졌다. 얄타가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던 세 여인의 삶에도 시련이 닥쳤다.
이미 잘 알려진 역사적 기록에 새롭게 발견한 자료를 더해 유려하게 직조한 책은 논픽션이지만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스토리텔링이 뛰어나다고 해서 사실 관계를 소홀히 다룬 것도 아니다. '성공적'이라는 자평에서 회담 수년 만에 부정적 기류로 확 바뀐 얄타회담의 평가와 관련한 내용도 충실히 담겨 있다. 저자는 "짧게 지속된 평화의 기쁨은 바로 뒤를 이은 공포, 전쟁, 비극에 침몰됐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책은 여성의 사회활동이 제한적이던 당시 명사로 살았던 세 여성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회담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지만 조력자로서 이들의 역할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이들은 얄타 이후 닥친 혹독한 순간에도 자신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캐슬린은 기자 일을 다시 시작하고, 애나는 부모님의 유산을 기리는 일에 헌신했다. 사라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아버지들이 회담을 진행하는 동안 전쟁이 휩쓸고 간 얄타 마을을 방문한 세 딸의 시선을 통해서는 전쟁의 상흔이 섬세하게 묘사된다. 저자는 "전후 세계는 세 여인을 잊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짧은 순간이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파트너, 보호자, 비밀을 털어놓는 친구가 되었던 기회를 절대 잊지 못했을 것"이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