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흥분해 있어요. 자신들이 ‘지사’라고.”
“막부 말기의 지사 말인가?”
“네.”
“그럼 지사들은 모두 조선인 복장으로.”
“자, 여우사냥을 시작하자.”
지난달 21~30일 도쿄 도시마구 소재 도쿄예술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어느 왕비의 죽음’에 등장하는 대사다. 을미사변을 정공법으로 진지하게 다루면서도 흥미로운 전개로 관객의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각본의 힘이 돋보인다. 일본인 관객들은 ‘이런 사건이 있었다니’라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각본은 시라이 게이타씨가 썼다. 극단 ‘온천드래곤’의 대표다. 수십 편의 연극 각본을 집필해 왔으며 연출을 맡거나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작품을 공연하고 한일 양국 교류에도 힘써 온 시라이 대표를 지난 14일 오테마치 소재 한국일보 도쿄지국에서 만났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일본인은 거의 모르는 주제다. 왜 연극으로 다뤘나.
“2015년 한국 극단 ‘골목길’과 교류하며 내 작품 ‘버스(Birth)’를 서울과 밀양에서 공연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연극계와 교류하게 됐다. 그러면서 한일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랑을 그린 ‘맹렬히 피고 진 그 꽃 비녀여’(2015년)와 ‘어느 왕녀의 이야기, 덕혜옹주’(2016년)를 쓰고 연출도 했다. 이런 작품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을미사변도 알게 됐다.”
-각본을 쓰면서 어디에 주안점을 뒀나.
“타국 외교관이 주도해 왕궁에 침입, 왕후를 살해한 엄청난 사건인데 일본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작품의 초점은 왜 그들은 일을 벌일 결심을 했나 하는 부분에 뒀다. 이를 알아내기 위해 그들이 직접 남긴 수기, 재판 기록 등 많은 자료를 읽었다.”
-범행을 모의하며 애국적인 행동으로 생각하는 장면이 눈에 띈다.
“자료를 읽어보니 면밀하기보다는 꽤 엉성한 계획이었다. 그들은 굉장히 흥분했고, 자기들을 ‘지사’라 부르는 데서 보듯 영웅주의적 면도 있었다. 이런 고양감이나 흥분이 러일전쟁으로 이어지고, 대륙 침략의 야심을 숨기지 않게 된 것 같다. 결국 이길 수 없는 상대에까지 싸움을 건 태평양 전쟁으로 치달은 대일본제국의 대실패로 가는 첫 사건이 을미사변이라는 생각이다.”
-고종과 왕후, 태자가 함께 보름달을 보며 얘기하거나 왕후가 노래 부르며 춤추는 장면 등은 픽션인데 왜 삽입했나.
“조선왕조의 생활도 묘사해야 하는데 일본어 자료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한국 드라마를 봤는데 픽션 요소가 너무 많이 섞였고, 복식이나 동작도 고증이 제각각이어서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어쩌면 존재했을지 모르는 평범한 가족의 모습’을 그리자고 생각했다. 밤에는 왕과 왕후로서가 아닌 가족이나 한 인간으로서 개인적인 시간도 보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일한연극교류센터 이사로서 연극계 교류에 열정적이다.
“한일월드컵이 열린 2002년 일한연극교류센터와 한국의 한일연극교류협의회가 협력해 첫 행사를 치른 후 양측이 20년간 매년 상대국 작품 낭독회를 번갈아 개최했다. 올해가 20주년이다. 정부 지원이 갈수록 줄어 어렵지만, 정치적으로 한일 관계가 악화한 지금 문화예술 분야라도 지속적으로 교류해야 한다. 내 작품을 들고 한국에서 다시 공연하는 날을 고대하고 있다.”
※연극 '어느 왕비의 죽음'은 '극단 청년좌' 웹사이트(바로가기)에서 유료 구매 후 2월 18~25일까지 영상으로도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