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에선 일본어, 중국어보다 한국어 사전을 먼저 내놓게 됐습니다. 작은 쾌거라 자부합니다."
동티모르국립대 한국학센터장을 맡고 있는 최창원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이 펴내는 '테툼어-한국어 사전' 출간을 앞두고 이렇게 강조했다. 최 교수는 21세기 최초의 신생 독립국인 동남아시아 국가 동티모르에서 한국어를 학습하는 수요가 높다는 데 착안해 직접 고려대를 방문해 사전 개발을 요청했고 집필자로도 직접 참여했다. 테툼어는 동티모르 수도 딜리를 비롯해 전 국토에서 이용되는 공용어로 '동티모르어'라 할 수 있는 현지어다.
최 교수에 따르면, 테툼어-한국어 사전은 동티모르의 고유 언어로 출간된 네 번째 이중언어사전이다. 한국어보다 앞선 외국어 사전은 동티모르 공용어인 포르투갈어, 비즈니스 언어로 통용되는 인도네시아어와 영어 등이 있다.
인도네시아와 호주 사이, 티모르 섬의 동부에 위치한 동티모르는 17세기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와 20세기 인도네시아 강점기, 그리고 독립운동과 유엔 개입을 거쳐 2002년 독립했다. 이 때문에 토착 언어인 테툼어를 포함해 네 언어가 두루 쓰인다.
26일 고려대에서 열린 사전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그레고리우 데 소자 주한 동티모르 대사는 "사전 발간은 두 나라 국민들의 깊은 관계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어는 포르투갈어와 영어, 인도네시아어 다음으로 중요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동티모르인이 한국어를 배우고 대화하고 싶어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반대로 한국 쪽에서는 비교적 동티모르에 대한 관심이 덜하고 테툼어를 접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최 교수는 이날 사전을 소개하면서 현실에서 쓰이는 테툼어를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 공식문서에서 이용되는 표기와 일상적 표기 규정을 두루 반영했고, 일상에서 널리 쓰이는 어휘와 동티모르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문화 어휘를 수용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쪽에서 기획부터 편찬까지 작업을 주도한 도원영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이날 출판기념회에서 "테툼어 화자들이 한국어를 쉽게 배울 수 없다는 점에 공감해 사전 편찬에 동참하게 됐다"면서 "양국이 서로의 언어를 학습하고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경로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최 교수가 처음으로 사전 제작을 결심한 것은 9년 전이다. 동티모르대에 한국학센터 과정을 개설한 2013년에 최 교수는 "동티모르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박복준 선교사가 '테툼어-영어-한국어' 언어장을 만든 것을 보고, 사전 없이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제대로 된 테툼어-한국어 사전을 만들자'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2015년에 입국하면서 사전 발간 능력이 있는 여러 전문 기관에 메시지를 보내 협업을 요청했는데, 곧바로 "같이 길을 만들어 보자"며 회신해 온 곳이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사전학센터였다. 이렇게 의기투합했지만 그 후 작업이 완성되는 데는 7년이 걸렸다. 2017년 네이버문화재단이 자금 지원을 결정하면서 비로소 사전 작업이 본격화했다. 네이버의 '테툼어 사전' 서비스에도 밑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최 교수도 직접 집필 작업을 맡았다. 한국어 교육 전문가인 부인 최현주씨가 2018년부터 한국 활동을 잠시 접고 동티모르로 합류해 작업을 도왔다. 최 교수는 "고려대 사전팀으로부터 사전을 만드는 데 필요로 하는 사항이 무척 많고, 역사적으로 사전을 만들다 죽은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어깨가 무거웠다"며 "부인이 아니었다면 집필에 나서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티모르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한국학센터 학생들도 손을 보탰다. 한국어 교사 부부와 학생들로 구성된 집필팀은 2019년 함께 본 한국 영화 '말모이'에 착안해 팀 이름을 '동티모르 말모이'로 지었다. 사전을 만들기 위해 언어를 채집하는 모습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영화를 본 학생이 말모이 정신대로 팀 이름을 말모이로 짓자고 제안했고, 나도 동의했다"면서 "사전 작업에 함께했던 말모이반 학생들의 한국어 성적이 향상되는 것을 보고 기뻤다"고 말했다.
예문을 다듬는 작업은 고되고 반복적이었다. 테툼어 자체가 인도네시아 점령기 시절 사용이 금지된 전례가 있고, 표기법도 표준 철자와 현실에서 자주 쓰이던 이표기,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무더위에 지치기 일쑤인데 정전도 자주 일어나, 마감이 다가오면 발전기를 돌리는 인근 호텔로 나가 작업하기도 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최 교수는 2008년 동티모르 자원개발부 장관 통역을 맡아 동티모르를 방문했다가 동티모르대의 제안으로 2009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어와 한국학을 가르쳐 왔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늘면서 한국학 수업은 매 학기 300여 명이 수강하고 있다. 최 교수는 "앞으로 한국어 수업에 테한사전을 사용해 학생들의 한국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뿌듯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