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잖아요. 한국 사회학이 어떤 경로로 여기까지 왔는지, 학문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일천했죠. 서양 학문이 어떻게 한반도에 들어와 우리 학문이 돼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사회학자로서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최근 출간된 '한국 사회학의 지성사'(푸른역사 발행)는 세계 사회학의 역사 속에서 한국 사회학 100년의 통사를 톺아본 책이다. 사회학자인 정수복(67) 박사가 200자 원고지 7,300매 분량으로 정리했다. 참고문헌만 2,000여 개, 각주가 7,200개에 이르는 대작으로 10년에 걸쳐 완성했다. 10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정 박사는 "한국 사회학계의 집단적 열광을 만들기 위한 공동 자산이 필요하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책은 '한국 사회학과 세계 사회학' '아카데믹 사회학의 계보학' ‘비판사회학의 계보학’ '역사사회학의 계보학' 총 4권으로 구성됐다. 한국 사회학을 제도화한 이상백을 필두로 배용광, 이만갑, 이해영, 김경동(아카데믹 사회학), 이효재, 한완상, 김진균(비판 사회학), 최재석, 신용하, 박영신(역사사회학) 등 11명의 대표 학자를 중심으로 한 평전 형식의 전기적 접근을 통해 한국 사회학의 역사를 성찰했다.
한국에서 공식적 사회학 연구는 미 군정 시기였던 1946년 서울대 문리과대학에 국내 최초의 사회학과가 만들어지면서 시작됐다. 자연스럽게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사회학계의 중심이 된 미국 사회학을 수용했다. 한국의 역사적 현실에 뿌리내리는 주체적인 사회학은 1970~1980년대에 본격화했다는 게 정 박사의 평가다.
정 박사는 11명 학자의 전기적 자료를 한국 사회학 역사의 기초 사료로 동원한 이유에 대해 "역사는 단순하게 기술하는 게 아니라 역사를 만들어 간 사람들의 시간을 역동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이라며 "학자 개인의 삶과 한국 사회학, 세계 사회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겹의 사회학'을 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책은 학자로서 자부심과 학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작업으로서의 의미도 크다. 그는 "교수 사회에서 등재학술지 논문 게재 여부가 승진·재계약에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는 탓에 경박단소(輕薄短小)한 논문이 양산되면서 학계가 대중·사회와 절연되고 있다"면서 "학자는 사라지고 연구자만 남아 학문의 가치도 약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국 명나라 사상가 왕양명을 인용해 "세상이 혼탁한 이유는 학문이 바로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정 박사는 학교나 기관에 속하지 않은 독립적인 "사회학자이자 작가"다. 그는 학계와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이방인'이었기에 이번 시리즈 출간이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출간까지 출판사 여섯 곳에서 거절을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내년에는 사회학을 넘어 역사학 철학 정치학 교육학 등을 망라하는 한국 근현대 학문의 지성사를 담은 책도 출간할 계획이다.
“미국 사회학자 라이트 밀스는 학자가 되는 것은 경력의 선택인 동시에 생활 방식의 선택이라고 했죠. 권력과 시장 논리에 침입당하거나 자율성을 잃지 않는 게 학자의 길인 거죠. 그래서 우리 학계에 보편적 가치와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을 지키려고 한 선배 학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부터 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