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년 철교, 80년 노동자 아파트… 사라지는 근현대 건축물들

입력
2021.12.29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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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공단, 경원선 선로 철거사업 진행
노동운동 성지 옛 인천산선 처리  갈등

6·25전쟁과 노동운동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 흔적이 남아 있는 건축물들이 잇따라 철거 위기에 놓이자, 보존 목소리가 확산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은 시대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건축물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개발 논리에 밀려 힘을 못 쓰는 분위기다.

경원선 철거구간에 있는 '한탄강철교' 보존 목소리 확산

28일 국가철도공단과 경기 연천군에 따르면 공단은 지난달 11일부터 경원선(서울~원산) 연천군 초성리역에서 전곡역까지 선로 3.9㎞ 철거에 나서, 레일과 침목 해제 작업을 거의 마쳤다. 공단은 2014년 착공한 동두천∼연천 경원선 복선전철 사업(20.9㎞)에 따라 해당 선로가 불필요해졌다고 철거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내년에는 동두천 소요산역~초성리역 4㎞ 구간 철거 작업도 예정돼 있다.

철거가 본격 진행되자, 연천 주민들은 "공단의 무지한 역사 인식으로 근현대사의 상징물이 없어지게 됐다"며 반발하고 있다. 주민들은 24일 청와대 게시판에 ‘연천 경원선 철로 및 한탄강 철교를 보존해 달라’는 제목의 청원글을 올리고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주민들은 "경원선은 107년 전 일제가 물자 수송을 위해 남북을 연결해 개통한 뒤 분단 이후 선로가 끊겼다"며 "일제 강점기의 뼈아픈 역사가 담긴 역사 유산을 단순 편의를 위해 철거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철거 대상에 포함된 한탄강 철교는 6·25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지금도 교각 곳곳에 총탄 흔적이 남아 있어, 아픈 역사의 흔적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의미가 크다. 연천 봉사단체인 온골라이온스클럽의 현미경 회장은 "일제의 가혹했던 물자 수탈 흔적과 한국전쟁의 아픔이 있는 이곳을 역사 교육 현장으로 보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단은 논란이 거세지자 "선로 보존 방안을 재검토하겠다"며 "한탄강 철교도 존치하는 방향으로 논의하고 있다"고 한발 물러섰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존치 놓고도 찬반 맞서

인천에서는 옛 인천도시산업선교회(현 미문의일꾼교회·옛 인천산선) 존치를 바라는 교회·시민사회단체와 철거·이전을 요구하는 재개발조합이 맞서고 있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조지 오글 목사가 1961년 설립한 인천산선은 노동운동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78년 '동일방직 분뇨 투척' 사건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피신처로 활용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19년 해당 사건과 관련해,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동일방직에 노조원 124명 해고를 지시한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 국기기관 개입 사건'으로 결론 내렸다. 1976년 지어진 해당 건물을 포함해 동구 화평동 일대 18만㎡에서는 현재 공동주택 3,183가구를 짓는 재개발이 추진 중이다.

인천 부평에서도 일제 강점기 강제 동원된 조병창(일본 육군의 무기공장)에서 조선인 노동자 사택으로 쓰인 산곡동 영단주택 1,000가구가 재개발사업 대상지에 포함돼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영단주택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조선주택영단이 1940년대 지은 건물이다. 부평에서는 1950~1970년대 번성했던 기지촌의 '드림보트 미군클럽'이 지난해 철거됐고, 1912년 지어져 국내 최초 비누공장으로 기록된 애경사(현 애경그룹) 터의 건물 3채도 2017년 사라져 비판 여론이 제기됐다.

이연경 인천대 학술연구 교수는 "정부 등록문화재 지정이 쉽지 않아 많은 건축자산이 무분별한 개발에 사라졌다"며 "지역 유산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지자체가 ‘향토유산’ 등의 형태로 법적인 보전 기반을 마련한 뒤, 역사체험관 등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구 기자
이환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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