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간 쇳물 콸콸' 韓 중공업 불 붙인 포항 1고로 '역사 속으로'

입력
2021.12.2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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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포항 1고로, 48년 만에 생산 중단
29일 종풍(終風)식 열고 쇳물 제거 진행
개·보수로 15년 수명 넘기고 세계 최장수 
중형 자동차 5,520만대 만들 수 있는 쇳물
포스코, 정비 후 박물관 건립해 일반 공개

“선조들의 핏값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짓는 만큼, 실패하면 우향우해서 포항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우향우 정신’과 함께 탄생한 국내 첫 고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포스코는 29일 포항제철소 포항 1고로에서 용광로 생산과 가동을 중단하는 종풍(終風)식을 가졌다. 종풍은 구멍을 통해 고로에 바람(산소)을 넣어 온도를 높이는 작업을 멈추는 것을 말한다.

이날 행사에 자리한 임직원 30여 명은 고로에 불이 꺼지자, 뒤돌아보며 눈물을 훔쳤다. 1982년 입사해 40년 가까이 1고로에서만 근무한 정철호(57) 파트장은 "작업복이 흠뻑 젖은 줄도 모르고 수십 년 씨름한 고로였는데 이제 떠나 보내야 한다니 믿을 수가 없다"며 "포스코의 자랑이자 심장이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학동 포스코 사장도 “48년 전 첫 출선 때 박태준 회장과 직원들이 만세를 외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아직 선한데 종풍이라니 만감이 교차한다”고 말했다.

국내 최장수 용광로이면서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 쇳물을 쏟아 낸 포스코 포항 1고로가 가동을 멈췄다. 한일 국교 정상화로 받은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돼 '민족고로'로 불리며 1973년 6월 9일 첫 생산에 들어간 지 48년 6개월 만이다.

포항 1고로는 1973년 6월 8일 오전 10시 30분 불을 붙이는 화입식을 가졌다. 국내 첫 고로인 만큼 태양열로 채화해 성화 봉송하듯 조심스럽게 옮겨 와 붙였다. 첫 쇳물은 예정 시간을 훌쩍 넘겨 화입 21시간 만인 6월 9일 오전 7시 30분 쏟아졌다. 눈이 빠질세라 애타게 기다린 박태준 회장과 임직원들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주황색 쇳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자,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통상 고로 한 기의 수명은 15년이다. 50년 가까이 가동한 포항 1고로는 3배 이상 장수한 셈이다. 1979년과 1993년 두 차례 대대적인 개·보수를 거친 덕에 철강 선진국인 미국이나 일본보다 오래 쇳물을 뽑아 내는 데 성공했다. 2018년에는 품질이 낮아 버렸던 저가 광석으로 쇳물을 얻어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합쳐 전체 9기 중 가장 낮은 생산 원가를 달성하기도 했다.

반세기 동안 포항 1고로가 생산해 낸 쇳물의 양은 5,520톤에 달한다. 인천대교 1,623개를 건설할 수 있고, 중형 자동차로 5,520만 대, 냉장고는 11억3,000만 대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남수희 포항제철소장은 “1고로는 50년간 한국 제철 산업과 중공업의 젖줄 역할을 해왔다”며 “포스코를 세계 6위 철강사로 성장시키며 대한민국 중공업에 기적을 일으킨 귀한 보물”이라고 말했다.

포항 1고로는 대한민국 산업화와 함께했지만, 탄소 중립이라는 시대적 흐름만큼은 이겨낼 수 없었다. 제철 산업은 전 분야를 통틀어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가장 많다. 포스코는 205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제로로 감축하는 ‘넷제로(Net Zero)’ 정책에 따라 1고로의 은퇴를 결정했다.

포스코는 고로가 완전히 식으면 내부 쇳물을 제거하고 안전 진단과 정비를 거쳐 일반에 공개할 계획이다. 고로는 통상 내부 온도가 1,500도가 넘는 만큼 남은 열이 내려갈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1고로는 내년 상반기 완전히 식을 것으로 보인다.

포스코 관계자는 “국내 최초 고로라는 역사적 가치와 의의를 고려해 포항 1고로 박물관 건립을 추진할 예정"이라며 "1고로 종풍에 따른 생산량 감소를 만회하기 위해, 남아 있는 8개의 고로도 개선 작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포항= 김정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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