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갈등이 정점으로 치달으면서 한국의 설자리도 점점 좁아지고 있다. 최근 베이징 동계올림픽 ‘외교적 보이콧’에 이어 ‘민주주의 정상회의’ 개최 등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공세 파고가 거세지자 두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지향해 온 정부의 ‘전략적 모호’ 기조가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이제는 어떤 외교적 선택을 하든 미중 양자택일 프레임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어 감수해야 할 손해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당분간은 국익을 기준으로 양측 설득에 주력해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분석이 많다.
정부는 9일에도 미중 관련 현안을 놓고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베이징올림픽에는 “외교적 보이콧을 검토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은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동계올림픽) 직전 주최국으로서의 역할을 하려고 한다”며 대표단 참석에 무게를 두는 발언도 했다. 또 문재인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주도하는 민주주의 화상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미중 둘 다 홀대하지 않겠다는 외형적 균형은 갖춘 셈이다.
청와대와 정부의 시각은 한미동맹과 대중 경제 의존도, 북핵을 비롯한 안보 이슈 등이 중층으로 얽힌 국내외 정세를 감안할 때 일견 수긍이 간다. 정부가 올림픽과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모두 챙기는 것도 미중 양국이 한국의 복잡한 처지를 충분히 이해할 것이란 판단이 깔려 있다.
그러나 미중의 싸움이 단순한 수사에 그치지 않고, 사활을 걸어야 하는 진영 대결로 격화하면서 그간의 줄타기 전략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단적으로 3일 공개된 한미안보협의회(SCM) 공동성명에는 ‘대만해협’ ‘5세대(G) 기술협력’ 등 중국의 이해와 직결된 민감한 내용이 대거 포함됐다. 12일 호주를 방문하는 문 대통령의 일정도 중국에 미국과 영국, 호주의 3자 안보협의체인 ‘오커스’에 동조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반대로 문 대통령이 베이징올림픽에 참석하면 ‘한국만 민주주의 동맹전선에서 이탈한다’는 미국의 반감을 살 가능성이 없지 않다.
정부의 선택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또 있다. ‘종전선언’이다. 현 정부는 베이징올림픽을 계기로 북한과 중국의 종전선언 동참을 끌어내 남북ㆍ북미대화를 견인하고, 결국에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구상을 완성시키는 선순환 구도를 그리고 있다. 이미 미국과는 문안 조율까지 거의 마친 상태다. 중국도 역할을 하겠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베이징올림픽이 남북미중, 선언 당사국 간 협력을 타진할 안성맞춤 무대였지만, 미국의 보이콧으로 미중의 의견을 조율할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이날 “종전선언은 참여자의 담판이 필요한 의제가 아니다”라며 올림픽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비관론이 커지고 있는 건 분명하다.
현재로선 미중 갈등이 어디까지 확장될지 가늠하기 어려운 만큼 사안별 탄력적 대응이 최선의 대안으로 보인다. 김흥규 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 소장은 “이분법적 선택 구도를 우리가 먼저 규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고,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미국도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반하는 결정을 할 때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 현안마다 국익에 기반한 결정을 내리면 선택의 폭이 넓어질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