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치의 심장부인 의사당에서 코카인 투약이 공공연하게 이뤄졌던 것으로 알려져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정치인의 마약 문제가 전례 없는 일은 아니지만, 근대 의회 민주주의 발상지인 영국에서, 그것도 의사당 한복판을 무대로 불거진 ‘마약 스캔들’에 정치권 전체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하필 보리스 존슨 총리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시점과도 맞물린 탓에 정치인들을 향한 비난은 더욱 커지고 있다.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난 의회는 부랴부랴 수사를 요청했다.
6일(현지시간) 영국 스카이뉴스 등 현지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린지 호일 하원의장은 ‘의회 내 마약 복용’ 문제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런던경찰청에 수사를 촉구하기로 했다. 전날 일간 더타임스의 주말판 선데이타임스가 “국회의사당인 런던 웨스터민스터궁 내 12곳의 장소에서 코카인 탐지 검사를 한 결과, 11곳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다. 의회에서 마약 투여 행위가 만연해 있다는 것”이라고 보도한 데 따른 후속 조치다.
마약 잔류물은 실제 곳곳에서 검출됐다. 우선 존슨 총리·프리티 파텔 내무장관 각각의 집무실과 가장 가까운 화장실이 가장 눈에 띈다. 야당인 노동당 사무실, 상원 내 식당에서도 발견됐다. 또 의회 사무처 직원, 언론인 등 의사당 출입증을 소지한 사람만 접근할 수 있는 곳에서도 코카인 흔적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선데이타임스는 “진보·보수 진영의 유명 의원부터 젊은 직원들까지, 의회 안에는 이른바 ‘코카인 문화’가 있다”고 촌평했다. 또 다른 마약류인 대마초를 누군가가 피운 정황도 포착됐다고 한다. 일간 인디펜던트는 “한 국회의원이 파티에서 공개적으로 코카인을 흡입하는 걸 봤다”는 익명 소식통의 발언을 보도하기도 했다.
영국에선 ‘의료 목적 대마초’ 이외엔 대부분의 마약류 투여가 불법이다. 특히 코카인은 ‘A급 마약’으로 분류된다. 단순 소지도 7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이미 중산층 등을 중심으로 실핏줄처럼 사회 구석구석에 번진 게 현실이다. 지난해 영국 통계청은 “16~59세 최소 87만3,000여 명이 1년 이상 분말 형태의 코카인을 흡입했다”고 밝혔다. 11명 중 1명꼴이다. 대마초에 이어 영국 내에서 두 번째로 많이 사용하는 마약이기도 하다. 존슨 총리 역시 10대 때 코카인을 흡입했다고 2008년 고백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라, 근대 대의제 민주주의의 발원지나 다름없는 영국 의사당에서 마약 복용이 노골적으로 이뤄졌다는 폭로에 정치권은 충격에 휩싸였다. 호일 의장은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에 대한 제재와 법의 완전하고 효과적인 집행을 기대한다”고 엄중한 수사를 요구했다. 하원 운영위원회도 이번 주 안에 관련 대책 논의에 착수할 방침이다. 위원장인 찰스 워커 보수당 의원은 “금지 약물 확인을 위해 (마약) 탐지견을 (의회에) 들이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점도 공교롭다. 선데이스타임스 보도는 당초 예정돼 있던 영국 정부의 ‘마약과의 전쟁’ 선포 하루 전에 나왔다. 이날 영국 정부가 마약 범죄를 퇴치하겠다며 공개한 10개년 계획에는 △2,000개 이상의 마약 갱단 단속·해체 △마약 사범 여권 박탈 및 운전면허 취소 △재활 치료 지원 등이 담겼다. 3년간 7억8,000만 파운드(약 1조2,222억 원)를 투입할 계획이다. 존슨 총리는 “마약은 우리 사회에 독이 되는 재앙”이라며 “마약 사범은 숨을 곳이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부의 강력한 마약 근절 의지를 피력하는 자리였지만, 바로 직전 터진 ‘의회 내 마약 스캔들’로 오히려 빈축만 사게 됐다.